발칙한 전굽러들을 위하여
태어나 보니 3대 독자 종갓집의 첫 손녀였다. 그 덕에 많은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자랄 수 있었지만 매 해 여덟 번이 넘는 제사를 치르며 잔심부름을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그렇다 해도 명절이나 제사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날만큼은 위트 있는 언어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고모나 기타를 즐겨 연주하던 삼촌들과 북적대며 함께 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견고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유년을 보낸 나는, 피를 나눈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끈적한 사랑과 며느리와 딸 사이 노동의 불공평, 가족 간에도 아니 가족이기에 존재하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치열한 정치 공방을 어렴풋이 깨달아가며 열 살이 되었다. 밀가루 떨어지면 사다 드리기, 요리하느라 기름 범벅인 엄마의 손이 되어 이것저것 가져다 드리기, 할머니 따라 떡집 가기 등등의 잔잔바리 일들을 해오던 내가 드디어 커다란 전자 그릴을 꿰차고 앉아 전을 굽기 시작한 나이이기도 했다. 번거로운 잔심부름을 동생들에게 넘기고 할머니댁 대청마루 센터에 앉아 전을 굽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손이 큰 할머니께서 진두지휘하던 제사상의 음식들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풍성했다. 전으로 부칠 새우만 2kg, 소고기 전감이 두 근에 할머니께서 바트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하던 명태포, 양동이 한가득 반죽해 부쳐내던 동그랑땡과 제사상에 올리지는 않아도 가족들 입가심으로 먹을 파전 반죽까지. 명절이 되면 부엌 한편에 식재료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곤 했다.
엄마가 손질해 주시는 재료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놓고 밀가루 옷 곱게 입혀 계란물에 입수시켰다가 노릇노릇해진 팬에 구워내면 고소하고 짭조름한 각종 전이 완성되곤 했다. 동그랑땡으로 전의 세계에 입성한 나는 전 굽는 데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며 점차 새우전과 소고기 전을 아우르는 프로 전굽러가 되었다.
그것이 고생의 서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한 번 앉으면 두 시간은 기본이었고 큰 제사날에는 하루 종일 마루에 앉아 엄마와 전을 구웠다. 튀는 기름에 손을 데어가며 허리와 목을 혹사시켜 전을 굽고 나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주방을 책임지지 않는 쪼무레기 보조의 입장에서도 가사는 너무도 힘든 것이었지만 명절과 제사가 싫은 것은 노동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구성원들 간의 힘의 역학이 숨겨져 있고 권력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억압이 있으며 가까운 사이이기에 저지르기 쉬운 정신적 폭력도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와 고모의 힘의 불균형은 고스란히 고종 사촌들과 우리 자매의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된통 기름을 뒤집어쓰고 꼬박 하루를 바쳐 마련한 음식을 상에 올려놓고 나면 그제야 예쁜 옷을 차려입고 뒤늦게 등장하여 곱게 인사를 나누는 사촌 동생들이 미웠다. 다 된 밥에 숟가락만 하나 얹어도 예쁜 것이 고종사촌들인 것만 같았다. 수많은 제사와 기름 냄새 속에 울고 웃었던 나는 어느새 명절이면 병을 앓는 며느리처럼 제사라면 질색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시간은 흘러 전과 함께 한 인생의 일 막이 저물고 결혼과 함께 또 다른 막이 올랐다. 시댁은 일 년에 세 번 있는 제사를 먹을 만큼의 음식만을 준비하여 소박한 제사상을 차려내는 집이었다. 2kg의 전감을 바라보며 한숨짓던 내가 전기 그릴도 없이 인덕션에 프라이팬만으로 두 시간여 만에 후다닥 요리를 끝내는 집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동안 딸이 없어 혼자 제사상을 차려 오셨다는 시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짧게 일하고 푹 쉴 수 있는 명절은 행복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척척 음식을 해내는 프로 일잘러 시어머니에게도 풀어낼 사연이 한 양동이쯤은 흘러나오는 것이 제사상의 미덕이다. 새침데기 동서들 사이에서 홀로 제사상을 짊어지고 40년이 넘는 시간을 남편집 조상을 위해 바쳐온 시간이 결코 호의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대대적인 변화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두 분의 어머니께서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한 날 동시에 ‘이제 명절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이니 푹 쉬든 여행을 가든 명절을 자유롭게 보내라’고 선언을 해오신 것이다.
40년을 이어온 프로 전굽러의들의 퇴장이었다.
집안 내에서 발언권이 강해진 50년대 주부들을 중심으로 명절 제사를 물리자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코로나를 거치며 큰 흐름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접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반갑게도 양가의 부모님들이 기꺼이 그 물결에 올라타주신 것이다.
그러나 제사를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사를 물리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집안에 생기는 좋지 않은 일들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로 귀인 되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지 않아 그런 것 같다는 아빠와 시아버지의 한숨 섞인 불평이 이어졌다. 아뿔싸 다시 전굽러가 되어야 하나 자유의 맛을 본 나는 다시는 기름 냄새나는 주방으로 돌아가기 싫은데. 그럴 때마다 불안감에 심장은 방망이질치곤 했다. 하지만 40년 내공의 프로 전굽러는 역시 달랐다. 한숨 쉬는 시아버지의 등 뒤로 시어머니의 냉수같이 시원한 일침이 이어졌다.
40년간 제사를 정성껏 지냈는데
교회 간다. 해외여행 간다. 하면서 오지도 않는 사람들은 잘 살게 해 주고
꼴랑 제사 한 번 안 지냈다고 벌을 내리면
그런 조상은 찬 물 한 잔 없다 해라.
이제 기제사도 없다!
뼛속까지 후련한 어머니의 말씀에 펄펄 화를 내던 조상들도 꼬리를 내리며 돌아갈 기세였다. 세상 많은 어머니들이 가족의 행복과 복을 빌기 위해 조상에게 예를 다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허리와 어깨를 내어 주며 평생을 프로 전굽러의 시간으로 보냈다. 그 긴 시간을 거친 뒤에야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제는 우리 사회가, 조상들이 들어야 할 때이다.
조상님들 이제는 복을 내릴 시간입니다.
부디 편안한 곳에서 푹 쉬시며
세상 모든 어머니들께 조금 더 편안한 시간을 선물해 주세요.
나는 이번 설에도 가족들과 함께 먹을 전감을 마련하러 시장으로 향할 것이다. 억울한 마음이 아닌 행복한 마음으로 전을 구우며 그렇게 진짜 전통은 계승된다. 이번 설 연휴에는 후해진 시간 앞에서 꼬까옷 입고 놀러 오던 고종사촌들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장소들로 뾰족구두 신고 놀러 가야지. 조상 앞에든 가족 앞에든 세상 당당한 우리의 어머니들과 함께.
#며느리 #명절 #설날 #전 #시어머니 #전통 #제사 #친정 #조상 #코로나 #불평등 #가사노동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