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세상에서 엄마가 되어…
"엄마, 나는 잘하는 게 없어.
수학 시험은 틀린 게 많아서 보충 수업을 받아야 하고,
쉬는 시간이면 뛰어나가 노는 친구들 틈에 섞이지 못해. 나 혼자 책만 보고 있어.
작가가 되고 싶은데 모르는 단어가 이만큼이나 많은 걸 보면 자격이 없나 봐."
사건의 시작은 수학 문제집이었다. 수가 느린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받아 올림과 받아 내림을 계산해 내기 시작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지 그날은 그마저도 버벅거리곤 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타박하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고개를 파묻고 있던 아이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내 눈에는 아직 아기인 것만 같은 아들은 자신의 우물을 이만큼이나 깊게 만들 만큼 훌쩍 자라 있었나 보다. 안타까움에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엄마의 마음을 붙들어 메어 놓는다. 우리가 지나온 숱한 사건과 세월들이 맷집이 되어 조금은 씩씩해진 것인지 이번에는 아이를 앞지르는 내 감정을 감추는 데에 성공했다.
숨을 고르고 준비한 이야기들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꺼낸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때로 너무 슬퍼서 때로 너무 흥분해서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건네어 본다.
- 너는 우리를 닮았지. 엄마, 아빠를 닮아 적극적으로 뛰어노는 아이가 될 수 없었던 거야. 굴뚝같은 마음으로 왁자지껄 뛰어나가고 싶어도 그 마음을 억누르는 더 큰 무엇이 있어 너를 자리에 주저앉히고 속상한 마음에 책을 손에 쥐게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그런 삶을 살아보니 결코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다소 내향적인 사람의 인생엔 또 그만한 크기의 즐거움이 있기 마련이야. 지금은 눈에 띄지 않고 자갈밭의 모래처럼 콕콕 박혀 있는 너와 비슷한 친구들이 하나 둘 움직여 무리를 이루면 그것으로는 견고한 성도 만들 수 있지. 물론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친구들 틈에서 사소한 역할이라도 차지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당장 외롭다고 너를 속여 꾸미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불편한 채로 뛰어들지 않아도 돼. 언젠가 더 큰 우정을 쌓을 날도 있을 테니까.
또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로 때로 활발한 친구들을 관찰만 하며 서운하게 보낸 그 시간이 네 안에 남아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는 눈을 키워 줄 거야. 그 시간들은 네가 조금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 곁에서 손 내밀어 줄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너에게 사람들의 미세한 슬픔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함과 세상의 아픔을 돌볼 수 있는 감각은 큰 자산이 될 거란다. 누구보다도 먼저 슬퍼할 수 있는 존재로 실존하는 것. 그게 바로 작가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지.
세상에는 활발해 보이지만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자신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많이 돌리는 사람들은 역으로 안으로 골몰하는 시간이 부족하기 마련이라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필요한 자리에서 꼭 해야 할 말을 조리 있게 해내지 못하는 거란다. 너에게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사색의 시간과 문장들이 있으니 언젠가 필요한 날이 오면 다른 이들을 대신해 꼭 필요한 말을 전하는 이야기꾼이 되어주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도 너로 인해 내 세상은 조금씩 확장된다.
학교에서 대답 없는 아이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내가 메모지를 준비해서 다니고 있어.
미세하게 흔들리는 아이들의 눈빛을 읽으려 노력한다.
쉬는 시간 홀로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농담 한 마디 더 건네는 날이 늘었어.
미숙한 엄마를 이끌고 이만큼이나 키워줘서 고마워.
나는 가끔 어떤 목적도 없이 이 슬픈 세상에 너를 데려다 놓아 끝도 없이 미안해진다.
어느 상황에서도 단단해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 아득해진다.
험한 길을 홀로 걸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아 그 작은 등이 더 쓸쓸하게만 보인다.
차곡차곡 쌓여 있던 말들이 결국엔 터져 나오는 날.
그날에 오늘의 눈물을 떠올리길 바라.
오늘의 슬픔이 힘이 되어 너의 곁에서 함께 걸어주길 엄마가 늘 기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