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희 Dec 01. 2023

제 아들은 덕후입니다.

덕질이 육아에 미치는 영향

- 엄마 지디가 마약을 한 거래!?

- 아니 손톱, 발톱도 모두 음성이래. 진짜로 안 했나 봐.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아이는 눈치도 못 챈 기색이다.

- 우와!!!! 악!!!! 으헝으헝!! 그럴 줄 알았어!! 지디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두 손을 부여잡고 감격하는 내 아이는 예민하기로는 동네 1등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다. BTS 지민군의 고모님이 지인이라 그의 사인을 갖다 줬을 때에도 심드렁했던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lol이었다. 부부가 함께 건강검진을 예약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도련님 댁에 반나절 맡겼던 날이 있었다. 놀아달라고 칭얼대는 조카 옆에서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며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3시간이면 한계다. 지친 삼촌 옆에서 이것저것 만져가며 놀던 아들은 급기야 삼촌의 모니터 전원을 켜고 말았다. 그러자 현란한 영상과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멋진 캐릭터들이 화려한 액션을 휘두르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지 않았겠는가? 말로만 듣던 'lol'을 직접 눈으로 본 아들은 lol며들기 시작했다. 고전적 슈퍼마리오 게임만 슝슝 픽픽 시간 맞춰 겨우 하던 아들에게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도련님이 급하게 컴퓨터 전원을 껐지만 물 잔은 엎어진 후였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삼촌 이거 뭐야? 한 번만 보여줘. 너무 멋지다.'를 연발하는 아이 앞에서 도련님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9살 조카에게 lol을 시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튜브에서 캐릭터 영상을 찾아 틀어주는 일을 선택한 모양이다.


 RPG류의 게임에는 서사가 있기 마련이고 각각의 캐릭터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현란한 영상으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화된 일이라 아이는 엄마, 아빠가 없는 시간 내내 판타지 영화를 보듯 그 세계관에 현혹되어 영상을 시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볼리베어'라는 캐릭터의 팬이 되어 장래 희망이 '볼리베어'라는 말을 온 천지사방에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우리 부부는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빠져드는 것이 팬심이라 아이의 열정은 깊어져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볼리 베어'의 대체제를 찾던 부모의 노력으로 운명처럼 '지드래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른 체구와 예쁘장한 외모에도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비현실적인 색감으로 탈색한 머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성과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에 아들은 홀린 듯 지드래곤의 덕후가 되었다. 힘센 아이들만이 인정받는 태권도와 축구의 세계에서 주눅 들어왔던 왜소한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우상을 찾은 듯했다.

- 엄마 나 커서 지디 같은 가수가 될 거야.

- 그래, 그래. 네가 그렇게 된다면 아빠는 정말 오래오래 살고 싶어. 아들!

그리고 그 순간은 아빠, 엄마와 아들의 이해관계가 10년 육아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후로 아들은 그야말로 덕질에 열심이다.


 엄마가 없는 시간 몰래 유튜브를 켜서 지디 영상을 찾아보더니 스스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익히며 뮤직비디오를 찍는다.

펌도 거부하던 보수적인 아들이 지디처럼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교에서 말도 잘 못하는 녀석이 그야말로 반의 스타로 부상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담임 선생님마저도 전화 오셔서 어머니 잘하셨다며 칭찬할 정도였으니 지디 땡큐.

작곡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배우기 싫다며 징징거리던 피아노 학원을 제 발로 찾아가게 되었다.

지디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큰 수에 눈뜨고 경제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100 이상의 숫자에 어지럼증을 느끼던 아들이 1억과 10억, 100억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중가요를 즐겨 들으며 자기 스스로의 음악 취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드래곤의 마약혐의 사건으로 신문과 뉴스를 즐겨 본다.

지드래곤의 음악이 엄마, 아빠 세대의 음악에 접해 있어 가족 간 대화의 소재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최근에는 지드래곤이 나왔던 무한도전까지 섭렵하며 아빠와 아들의 같은 프로그램을 향한 진한 애정의 연대가 펼쳐지는 광경도 목격한다.

그의 SNS를 살펴보다 '신곡'(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보임)의 일부를 듣고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야말로 인문학의 대향연이다.

지디에 대한 관심이 그의 옷으로도 이어져 옷차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소 원색 계열의 옷에 저항감이 없어졌다랄까? 진정한 패셔니스타는 무채색 옷을 입는다지만...


유튜브 시청 기록


출근해서도 아이를 향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엄마는 아이의 시청 기록을 주르륵 훑어본다. 오늘도 역시 지드래곤의 뮤직비디오를 시청하고 학교에 갔나 보다. 오늘의 선곡은 'loser'다. 아침에 듣기에 적합한 곡이 아니네 클래식이나 동요를 들어주면 오죽 좋을까 더 나아가서 손흥민 같은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옆집 아이처럼 조금 더 남성스러운 그 무엇에 빠져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속상하다가도 또 아이 인생을 두고 언감생심 자격 없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엄마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유튜브 시청 기록 한가득 '볼리베어'가 아닌 것이 어딘가 생각하니 괜히 지드래곤에게 고마워진다.


지금 나는 아들의 덕질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초보 엄마이다. 아들의 나이가 많아지는 만큼 나의 '처음'도 많아진다. 삐걱거리며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지만 그의 취향을 존중하고 지금처럼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을 나눔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


덧. 고마워요 지디, 마약을 안 해줘서도 고맙고, 예쁜 색으로 염색해 줘서도 고마워요. 'H.O.T.' 덕질할 때도 한 적 없던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요. 신곡 발표 응원할게요. 내내 건강해줘요.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

 



#지드래곤 #덕후 #팬클럽 #덕질 #육아 #아들덕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