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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30. 2023

파리행 야간 열차

처음 여행을 떠나는 그대를 환영합니다.


 2012년 7월 31일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야간 열차를 탔다. 악명 높은 열차다. 유럽 배낭여행으로 유명한 커뮤니티 '유랑'에서 이 열차를 검색해 보면 소매치기범과 폭행범들로 인해 배낭 여행자들이 겪은 크고 작은 사고들이 쏟아지곤 했다.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난지 3주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트렁크를 부여 잡고 쿠셋에 올랐다. 다행히 같은 쿠셋에 탑승한 네 명이 모두 여성인 상황이었지만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 속에 서로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좁은 공간 안에서 멀뚱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 때, 옆에 있던 동양인 여성이 더이상은 못 참겠다는듯 벌떡 일어서며 짐을 부탁하고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방광 사정으로 인해 비로소 편안한 기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짐을 맡아둔 보답으로 받은 맥주 한 잔을 넷 이서 나눠 마시며 이야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단정한 까만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민첩한 몸놀림을 구사하는 일본계 미국인 나탈리와 4개 국어에 능통한 수줍은 영국 언니 크리스티나, 개방적인 성격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모로코인 중년 여성 라잔과 나는 생의 그 어느 접점도 가지지 못한 타인이었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기차라는 공간의 특수성 속에서 수학여행을 떠나는 여고생들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의 인생에 호기심을 가지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날은 4주간의 배낭여행 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 중의 하루가 되었다.


 생의 어느 순간에고 안정적인 자신의 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거기에는 개인을 그 능력에 맞게 적재적소에 임용하는 사회 구조나 시스템의 역할도 막중하겠으나 어렵게 얻은 ‘내 자리’를 둘러싼 타인들의 ‘환대’가 그 어느 부분보다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처음으로 자기 자리를 가진 이들을 생각한다.

믿을 수 없는 타인으로 둘러싼 막막함 속에서 서먹서먹하고 불안한 첫 날을 보내고 있을 그들을.

자신의 어눌함과 능력 없음을 자책하고 거대한 열차 같은 조직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부족한 내 영어 실력을 배려하여 쉬운 단어로 대화를 이어 가던 열차 속 그녀들을 떠올릴 것이다.

한 발 먼저 기차에 탑승하여 소매치기도 맥주 한 잔의 기쁨도 느껴본 내가 이제는 그들을 향해 짐을 내려 놓고 편히 여정을 이어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받고 싶은 환대를 기꺼이 베풀며 목적지까지 편안한 여행을 함께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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