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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02. 2023

오늘  밤을 기다렸어.  

2023년 11월 2일

오늘 밤.

드디어 오늘 밤이야.

오늘은 애들을 일찍 재우고, 아껴 뒀던 촛불도 예쁘게 켜고, 맥주에 간단한 안주도 준비해서 우리 같이 만나.

오늘을 위해 어제는 8시간 숙면도 취해 두었지 뭐야.

잠도 오지 않을 거야.

나는 즐거움에 두근두근.

오늘은 2년 만에 우리가 만나는 날이니까.




 남편이 1박 2일간 출장을 갔다.  

 아무리 사이좋은 부부 사이이더라도 남편과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가령 함께 <스물다섯, 스물 하나>를 보며 각자의 첫사랑을 추억해 본다든지(생각만해도 진땀이 난다.) <사랑의 불시착>을 보며 현빈의 이북말에 발을 동동거린다든지 하는 일들이 그런 것들인데, 내게는 이 목록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 콘텐츠가 있다.  2년 전 나를 빠순이의 세계로 인도했던 <스.우.파.>가 바로 그것이다.


 멋지게 춤을 추며 경쟁하는 쎈 언니들을 보며 나는 한껏 상기된다. 현빈이나 남주혁을 볼 때처럼 그녀들의 몸동작 하나하나에 두근거리고 '꺅꺅' 넘어가기도 하면서, 도저히 그냥은 삼킬 수 없는 리액션을 맘껏 표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멋진 언니들을 사랑하는 나답게 남편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왔기에(이중 인격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이다. 암만!


 완벽한 몰입을 위해 이제까지 <스우파2>에 대한 어떤 신문기사도 읽지 않고 영상도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쇼츠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면 서둘러 눈을 가렸고(그럼에도 이바다 언뉘의 멋짐에는 벌써 눈을 떠 버렸다!) 우승자가 어느 팀이라는 신문 헤드라인을 보며 버젓이 스포일러를 감행하는 언론사의 엉망진창 언론 윤리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질 내가 아니지, 오늘 밤을 기다리는 흥분에는 변함이 없다.


 악마의 편집에도 불구하고 스우파를 챙겨보고 애정하는 것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여성들의 진짜 매력 때문이다. 싸우고, 경쟁하고, 노력하고 그리고 마침내 쟁취하는 모습, 때로 강하게 때로 부드럽게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을 이끌어 나가는 유연성과 강렬함의 콜라보!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려운 목소리 큰 여성들의 매력적인 모습을 여기서만은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이입하여 눈물짓고, 화를 내기도 하며 프로그램을 즐기는 어느 순간에선가부터는 억눌려왔던 강렬한 여성적 공격성이 자극되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산모 의자에 앉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다리를 벌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날 내 안에 있던 어떤 존재는 죽었다. 어렵사리 길러 놓은 내 안의 '멋짐'이란 것이 뿌리까지 말라버렸고, 자존감의 큰 가지는 영구적으로 손상되었으며 '산모님' 혹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체성도 잃어버렸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때까지 여성성과 성적 매력의 상징이었던 가슴이 누군가의 밥통이 되어 그 모양이 아닌 기능성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그 어느 쪽에서도 가슴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누구든 아이를 봐주기만 할 양이면 심장이고 콩팥이고 다 떼다 바칠 열정으로 굽신거리게 되었고 '엄마충'이라는 말을 들을까 아이와 함께 다닐 때에는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나를 규정하는 가장 큰 정체성은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잃을 것이 많은 '엄마'들에게 그것은 '약자'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동물들이 나오는 다큐를 즐겨 본다. 그들의 육아 세계에서 어미가 주눅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 새끼를 낳은 어미일수록 공격성을 내세우고 자신과 그 가족을 지켜 나간다.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여느 수컷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기세로 상대를 몰아쳐야만 겨우 새끼를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새끼들은 우리가 한 가문의 자긍심을 보고 배우듯 어미의 기세를 이어받아 평생을 살아갈 힘을 새겨 나간다.


 생의 어느 순간 공격적인 암컷이었던 나는
거세당한 한 마리의 어미가 되었다.


  나를 지켜나갈 힘과 기세를 남편과 사회에 외주 주고 있으면서 어찌 멋진 삶의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까. 물리적인 힘을 기름과 동시에 유연한 자세를 가지는 것.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부를 경계하는 동시에 제 새끼를 야생에 더질 수도 있는 기세를 가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기백이고 제 새끼를 잘 길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여성이 아닌 암컷의 모습을 닮은 언니들을 보며 깨달아 가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밤 그녀를 만날 것이다.

제각각 멋짐을 폭발시키는 언니들을 보면서 작지만 단단한 카리스마로 내 삶을 호령하던 ,

날것의 모습으로 으르렁대던 암컷인 나를 다시 만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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