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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결혼하고도 당연히 일해야죠

어린 시절 친정 부모님은 늘 싸우셨다.     

“당신 이 쥐꼬리만 한 월급 때문에 생활을 할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초등학생 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우리 집은 1~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다. 성인이 되어 알았다. 집주인의 전세자금을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은 금액에 맞춰서 이사를 하셨다. 친정 부모님의 돈 때문에 부부싸움으로 나는 결심했다.     

“그래,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그러면 싸움도 일어나지 않는 오순도순 행복한 삶을 살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친정 부모님의 “돈 아껴 쓰고, 저축을 해라”라는 이야기를 귀 따갑게 들었다. 그래서 월급의 80%를 저축을 시작했다. 그 시절 금리도 10%여서 만기 때에는 이자도 두둑이 받았던 기억이 생각난다.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남편과 우리는 만날 때마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사업부도로 힘들어진 가세로, 8년간 택시 근무를 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았었다. 매주 데이트를 하면서 수많은 에피소드를 들었다.     

“학생 어디까지 갈 거야?”

“아저씨, 아저씨 언제 봤다고 나한테 반말이세요?”

“어. 그래. 미안해 학생.”      

남편은 앳된 중학생 고객과 이야기 중에 기분이 상해서 그 뒤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드는 학생은 태우지 않았다는 이야기. 술 먹고 술기운에 업 된 한 고객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바다 보러 갔지만, 택시비가 없어서 혼쭐난 이야기. 운전하는 사람을 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고생, 생활고의 풍파가 심했던 남편의 환경은 그를 더 단단하게 해 준 듯했다.     

남편과 데이트 시절 늘 이야기했다.     

“00 씨 나는 결혼해도 일을 할 거야! 어떻게 생각해?”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일해도 좋지.”     

연애하던 때부터 남편은 일하는 나를 지지해주었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자상하고, 내일을 지지해주는 동갑내기 남편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해서도 나는 특별한 손기술이 있기에 당연히 일 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나는 고급인력이기에 집에서 육아와 살림만 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나 막상 육아를 하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변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큰아이 친구 엄마는 지금도 꾸준히 직장을 다니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친정어머님의 도움 덕분에 꾸준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내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결혼해서 육아에만 올인했던 여동생은, 어린아이들을 돌보느라 자기 계발을 하지 못 한 게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다. 조카가 어린 시절 대학원을 가고 싶어 했지만 제부의 반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게 한이 된 모양이었다. 지금은 하고 싶은 공부도 하면서 바쁘게 사회생활하는 여동생에게 작은 박수를 보낸다.     

가족도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성취하고 성장하고 싶었다. 나는 집안에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육아하고 내조하는 사람이 아닌, 사회 일원이 되어서 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는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엄마, 며느리, 아내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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