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봄빛>
초여름 즈음에 베스트셀러라는 어떤 소설을 읽다가 중단하고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읽었다. 가짜에 질려서 진짜 이야기를 읽고 싶었고 여름 내내 읽은 <빨치산의 딸>은 차고 넘치도록 갈증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정지아 작가의 유튜브 강의나 인터뷰를 실컷 찾아본 다음 <봄빛>을 읽었다.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 91쪽
-그냥. 퇴근을 하고 갔는데, 여자 슬리퍼 하나, 남자 슬리퍼 하나, 여자 구두 하나가 일년 내내 그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게 무서워서. 그 옆에 내 구두를 벗어놓기 무서워서. 하나둘씩 늘어나는 세간도 무섭고, 그것들이 반짝반짝 윤을 내는 것도 무섭고. , 97쪽
-하루를 가장 단순하게 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들이 그 남루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벽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널려 있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여자는 날고기를 먹듯 일상의 남루를 맨눈으로 보며 자랐다. , 101쪽
-세월은 가랑비맹키 짜작짜작 흐름시롱도 황톳물맹키 오만 기억을 다 집어생켜갖고라, 암것도 없이라, 누런 제 빛깔로 싹 쓸어가분갑그만이라. , 318쪽
근력량이 떨어지는 게 허벅지나 배만 떨어지는 게 아닌 것 같다. 감정근육이나 뇌근육도 떨어져서 화를 참지 못하겠고 생각나는 말이 입으로 그대로 뱉어지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 맘에 안 드는 책을 예전에는 그래도 끝까지 읽었고 읽어보면 왜 작가가 이런 책을 냈는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되는 기분이 들어서 나 자신의 부족함이나 좁은 그릇을 깨닫게 되는 자아성찰적인 독서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맘에 안 들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면 행동이나 말로 옮겨버리는 행태가 독서에도 그대로 반영되네. 그래도 여튼 한 작품에 대한 짜증이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그리고 개정판 소설집까지 읽게 했으니 남한테 피해는 주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