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국 브라질 여행 ep.4
가난은 안전에 대한 최고의 보험
홍콩 무전여행 때의 일이다. 당시 홍콩은 물가가 높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이라 배그 패커들이 돈 벌기 가장 좋은 도시였다. 그곳에서 나는 낮에는 육교 위에서 마크라메팔찌를 만들어 팔고, 해가 지면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에서 영상 편집을 하고, 밤이 되면 공원에 숨어들어 텐트를 치고 살았다. 그런 하루들이 쌓여 홍콩에 온 지 일주일을 넘길 무렵, 그제야 슬슬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짐이 문제였다. 무전여행, 아니 노숙생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배낭이다. 배낭을 맡길만한 숙소를 최저가 순으로 뒤적였지만, 인구밀도가 높은 홍콩의 비싼 숙박비는 당시 내게 너무 큰 돈이였다. 그렇다고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건 생각만해도 피곤했고, 그건 여행 의욕마저 사라지게 했다. 그 때, 남자 친구는 나는 생각도 못해본,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창의적인 해결책을 내놨다. 바로 배낭을 그냥 육교 밑에 두고 가자는 것.
우리가 팔찌를 팔던 육교 밑에는 치매걸린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노숙자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다. 그 곳에 꽤나 오래 사셨는지, 할아버지 양쪽에는 뭔가가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는 그 옆에 살포시 배낭을 맡겼다. 맡긴다는 말은 했지만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으니, 그냥 두고 갔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칙칙한 종이박스들 옆에 세워진 내 빨간 배낭이 너무 튀는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낭에서 노트북을 빼냈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노트북마저 배낭에 그대로 두었다. 그것도 불과 이틀 전에 새로 산 맥북을 말이다. (홍콩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맥북이 저렴했기 때문에, 일주일간 홍콩에서 번 돈으로 맥북을 샀었다.) 그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아무도 저 가난한 할아버지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렇다. 가장 가난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안전을 보장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돈이 많은 곳엔 보안과 경비가 삼엄한 이유도 그 곳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보안과 경비가 있어서 안전한 게 아니라, 애초에 위험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했다. 반대로 보안과 경비가 전혀 없는 육교 밑은 홍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인심을 이긴 돈
브라질 내에서도 치안이 나쁘기로 유명한 ‘포르탈레자’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나즈미 아비를 만났다. 당시 포르탈레자는 몇 달째 락다운 중이었고, 아비도 오랫동안 식당 문을 닫고 배달 영업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독일 은퇴 이민자였기에 이런 상황에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몇 달째 수입이 없는 상황에 오히려 내가 더 걱정될 정도였지만, 그는 한결같이 여유로웠다. 덕분에 우리는 문닫힌 그의 식당에서 2주간 머물며 그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다. 지나치게 과분한 호의가 불편할 정도였지만 그는 한사코 돈을 거부했고,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샌드위치를 무려 20개나 싸주셨다. 그의 호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 락다운에도 그의 직원들은 매일 출근했고, 우리는 밤마다 그들과 카드게임을 하고 놀았다. 그럼에도 그는 직원을 자르지 않았고 월급도 그대로 지불했다. 식당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노숙자들이 찾아와 음식을 구걸했고, 그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햄버거를 건넸다. 그게 너무 고마웠던 한 노숙자는 매일 텅 빈 식당 주차장을 청소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그는 폐업하고 독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치안이 이유였다. 그의 식당에는 단단한 철문과 전기 철조망, 감시카메라만 3개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난 일주일간 강도가 두 번이나 들었다는 것이다. 강도는 경제적 타격보다 더 큰 ‘정신적 타격’을 준다. 돈이야 한번 털리는 걸로 끝이지만, 총을 든 강도를 마주했을 때의 공포는 트라우마가 되어 오래도록 남는다. 불안한 마음에 잠에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는 사업을 포기하고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여유는 결국 그에게 위협을 가했다.
상파울루에서 시작한 5개월의 브라질 여행을 끝내고 멕시코로 날아가기 위해 다시 상파울루로 돌아왔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터키 여행자들을 만났고, 그중엔 파벨라에 사는 터키인(메틴 아비)도 있었다. 메틴 아비도 나즈미 아비처럼 요식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달랐다. 그는 파벨라에 위치한 작은 집에서 바클라바(터키 디저트)를 만들었고, 낮에는 그 바클라바를 쇼핑몰에 납품했다. 한 때는 이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좋은 회사에 다녔던 그 또한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지만, 여전히 파벨라에 살기를 고집했다. 파벨라가 가장 안전한 곳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5개월 전 상파울루에 처음 왔을 때, 고층빌딩이 늘어선 화려한 대로에서 조차 위협감을 느꼈으니, 나는 이 도시에서 안전한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파울루 파벨라는, 상파울루에서 머물렀던 한 달 동안 가장 안전하게 느껴진 곳이었다. 밖에서 보면 위험해 보이지만, 막상 그 속의 사람들은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살았다. 문을 잠그지 않고, 깨진 창문도 그대로 두는 것. 부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파벨라에서는 가능했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
브라질에서 파벨라가 없는 도시는 없지만, 리우는 그중에서도 파벨라가 가장 많다. 또한 리우의 파벨라는 가장 위험하기로도 유명하다. 리우의 ‘비지갈 파벨라’는 이파네마와 연결된 레바논 비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쉐라톤 호텔과 바로 붙어있는 비지갈 파벨라는 관광지와 가까운만큼, 다른 파벨라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기 때문에 파벨라 투어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 ‘헨리’를 만났다. 그는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소개했지만, 나는 단번에 그가 브라질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파벨라 출신인 게 오히려 더 안심이었지만, 관광객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는 만나자마자 절대 허락 없이는 촬영을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파벨라’ 단어만으로도 앰팩트가 워낙 강한지라 촬영 욕구가 솟구쳤지만, 함부로 카메라를 휘둘렀다가 마약상이라도 찍게 되면 헨리까지 곤란해질 것이었다. 아쉽지만 카메라는 고이 가방에 넣어둔 채, 모토 택시를 타고 비탈길을 올라 파벨라로 진입했다.
그리고 바로 총든 마약상들을 마주했다.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바짝 쫄렸다. 파벨라 입구부터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이렇게 쉽게 마약상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총을 든 경찰과 총을 든 마약상의 거리는 10m도 되지 않았다. 파벨라에는 매우 이질적인 이 두 존재가 비슷한 모양새로 공존하고 있었다.
콜롬비아의 파블로 에스코바르, 멕시코의 엘 차포를 비롯한 대다수 마약상들의 주거지는 언덕배기 빈민촌이다. 경사지고 좁은 골목길들은 사회 감시망을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들이 보다 안전하게 숨기 위해서는 주거민들의 협조도 필수다. 때문에 그들은 마약으로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빈민촌에 기부한다. 이는 수많은 마약상들이 ‘로빈후드’로 불리며 두꺼운 팬층을 거느리는 이유기도 하다. 비지갈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이 곳에 주거하는 약 3만 명의 시민들에게 전기를 (무료)공급해 주는 건 정부가 아닌 마약상이었다. 파벨라의 주민들과 마약상은 일종의 공생관계로, 서로를 싫어할 이유도 건드릴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경찰과 마약상의 역할이 뒤바뀐 경우도 빈번했다. 마약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파벨라의 정부였다.
국적 막론하고 혐오하는 직업이 딱 두 가지 있다. 바로 ‘택시기사’와 ‘공무원’이다. 그중에서도 경찰 공무원은 죄질이 아주 나쁘다. (물론 좋은 경찰도 있겠지만) 대부분 직업의식은 전혀 없고 오르지 자기 주머니 챙기기에만 바쁘다. 부패한 나라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지는데, 브라질도 그중 한 곳이다. 리우에서 같이 여행하던 친구가 바로 코앞에서 아이폰을 도둑맞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어플로 핸드폰 위치를 알아냈고, 바로 경찰의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도 핸드폰 가격과 맞먹는 거액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당연하게도) 친구는 돈을 지불했지만 결국 핸드폰은 찾지 못했다. 브라질에서 경찰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가장 피해야 할 존재다. 공권력이 동반된 양아치 짓은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괜히 얽혔다가는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여행자가 겪은 경찰의 부정함이 이 정도니, 브라질 시민들, 특히 빈민촌 사람들이 껵어야 하는 경찰의 부조리함은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파벨라에서 마약상은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주고, 경찰은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존재였다.
이처럼 주거민들이 마약상을 응호 하는 것은 단순히 이해관계 때문만이 아니다. 마약상은 경찰의 부정부패의 상징, 그 자체다. 정치인들 역시 마약사업에 깊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에, 마약상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마약상의 힘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돈이 되는 마약사업은 정치인들에게도 이득이기 때문이다. 파벨라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헨리를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마약상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마약) 파티가 열릴 때마다 경찰이 받는 뒷돈의 금액까지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밤 파티가 열리며, 그때마다 경찰이 받는 액수는 500 헤알이다.) 이곳에선 경찰과 마약상 또한 공생관계라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큰돈을 벌어도 결국 마약상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범죄자일 뿐이다. 그들은 총을 들고 위협감을 과시하지만, 파벨라 좁은 골목길에 숨어 살아야만 하는 도시의 ‘쥐새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런 ‘쥐새끼’에게 뒷돈을 받는 경찰은 ‘개새끼’였다. 파벨라가 위험한 이유는 오르지 ‘쥐새끼’와 ‘개새끼’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합의 하에 파벨라에 공존하지만, 간혹 이 둘 사이에 수가 틀리면 총격전이 벌어진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비지갈에서도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은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희생되는 건 이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
헨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비지갈 파벨라는 지도자를 뽑는 선거 기간이었고, 헨리의 이웃 중 한 명이 선거에 출마했다. 덕분에 선거활동에 참여하며 파벨라의 밤거리를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집집마다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파벨라의 밤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코파 해변만큼이나 활기찼다. 좁은 계단식 골목길엔 동네 꼬맹이들이 뛰놀고, 주민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 곳엔 삶이 있었다. 이들에겐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업이 있다. 이들은 마약중독자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라는 일도 없다. 경찰과 마약상만 없다면, 파벨라는 그저 평범한 마을일 뿐이다. 탁 틔인 헨리의 집 테라스에 드러누우면 리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언덕 위에 알록달록 쌓아 올려진 파벨라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들이 고층빌딩에 사는 부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나도 높은 곳에서 너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고 말이다.
이들이 밝히는 파벨라의 불빛은 리우의 일부이자 또 하나의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빈민촌에 대한 편견이 있다. 빈민촌에 사는 빈민들이 불행하고 그래서 위험할 거라는 것. 하지만 이는 말그대로 편견일 뿐이다. 부와 행복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들은 이미 세상에 차고 넘쳤다. 결국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파벨라의 삶은 꽤나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더 많이 웃었고, 이웃과 더 가까이서 사랑하고 나누며 살았다. 메틴 아비가 사는 상파울루 파벨라의 이름은 paraisópolis 다. 천국이란 뜻이다. 터키에서도 높은 곳의 빈민촌을 ‘천국’이라고 부른단다. 메틴 아비는 사람들은 그곳이 가장 행복한 곳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행복했고, 그래서 남을 위협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엔 더 특별할 것도 더 부족할 것도 없는 평범한 삶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