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일기
어느덧 귀국하여 한국에 자리 잡은 지도 반년이 되어 간다.
그사이 나는 나이를 세 살이나 먹어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변화가 생겼다.
졸업 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정착 생활을 결심했고,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일도 시작했다.
4년의 연애 끝에 다시 혼자가 되었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20대의 나는 남들보다 뭐든 조금씩 빨랐다.
일찍이 경제활동을 시작했고, 돈을 모았고, 덕분에 여행도 많이 했다.
어디서 누굴 만나든 내가 가장 어렸고, 막내로서 사랑받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러 사람에게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리다는 이유로 사랑받고, 도움받고, 칭찬 듣는 게 좋았던 나는
높은 연령대의 사람들과 주로 어울렸다.
취미활동도 엄마 따라 산악회, 마라톤 동호회 같은 것들을 하며,
우리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은 어른들과 어울렸다.
개중엔 부를 축척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내 또래들이 그들처럼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에게서 '어려서 좋다'거나 '대단하다', '특별하다'와 같은 말들을
밥 먹듯이 들었으니, 마치 내가 그들보다도 더 대단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였던
전남자친구들이 대학생이었던 나를 무슨 생각으로 만났는지 뻔하지만,
또래와는 달리 이미 직업도, 차도 있는 그들이
(그 나이대엔 그게 특별히 대단한 게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나 자신이 멋져 보였다.
그렇게 오만했던 20대를 거쳐 서른이 되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몰랐던 서른.
흔히 말하듯, 집도 있고 차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서른에
나는 집은커녕, 남동생의 자취방에 얹혀살고, 차는커녕 운전면허조차 없다.
명품은커녕, 친구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 얼마인지는 가늠조차 못한다.
나이 먹기 싫어서 SNS로 엠지들의 단어를 습득했지만,
정작 서른의 언어를 알지 못해 어리숙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속에 숨은 뜻을 읽지 못했고,
그래서 실수도 많이 했다.
그래서 조금 많이 아프다.
어렸던 내가 함부로 남을 평가하고 무시하며 채웠던
내 어설픈 자존감에 대한 대가다.
이제야 아픈걸 보니, 내 청춘은 이제부터인가 보다.
예전에 올린 블로그 글들과, 일기장 속에서 발견된 과거의 나는,
이게 정령 나였나 싶을 정도로 낯설기만 했다.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된 지금은
한편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확정적이고 뚜렷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한국에서 알게 된 새로운 인연들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거다.
어설픈 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나보다 더 큰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애정을 느끼며, 나도 그들처럼 되어가려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예전엔 미쳐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이 영감을 주고,
그 영감은 익숙한 것들도 새로이 생각게 했다.
그 생각들이 아직 명확하진 않아 표현하기 어설프지만,
그만큼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않다.
조금 더 힘을 빼고,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을 따뜻하게 채울 수 있는
슬기로운 서른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