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은 효리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웅크리고 앉아있는 효리의 모습은 머리가 헝클어져있고 주변에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여져 있었다.
"왔어?" 효리는 동민의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무릎사이에 얼굴을 숨겼다. 동민은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가슴이 불일듯하게 짠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동민은 효리에게 물었다 "승모 그 새끼냐" 효리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동민이 말했다.
"오빠가 어떻게 하게 그냥 하지 마 오빠까지 다쳐. 그 인간 제정신이 아니야 사람 목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인간이야. 일 크게 만들지 마"효리가 말했다.
"그러면 어떡할 건데. 뭔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이건 시작이야 너한테 뭔 일을 할지 모르는 놈이야" 동민의 말에 효리는 동민을 쳐다봤다.
"그건 오빠가 할 소리는 아니지. 오빠도 나 돈으로 보잖아. 내 몸 팔아서 돈 벌면서 그것보다 더하겠어? 뭐 해봤자 장기나 떼어가겠지" 효리의 말에 동민은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악을 질렀다. 효리는 그런 괴성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듯이 반응했다.
동민은 오는 중에 약국에 들러 산 약봉지를 효리바로 옆으로 던지고 집 밖을 나갔다. 효리는 밖으로 삐져나온 약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죽고 싶을 뿐이었다. 귀에서 들리는 이명이 그녀를 두르고 있는 비극과 하모니를 이루며 효리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효리는 다짐을 했다. 죽기로 말이다. 손목을 그을까 아니면 몸에 불을 지를까 그게 아니면 자신이 이모와 숙부를 죽였듯 약을 먹을까 고민을 했다. 자신의 죽음을 가져다줄 방법을 물색하는 게 효리에겐 고통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머뭇거렸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은 시원한 마음을 느꼈다.그러다 문뜩 그때 두 사람을 죽인 약이 아직 방안 책장에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방안을 쳐다봤고 책장 위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약이 보였다. 효리는 약을 꺼냈다. 약봉지에 옅게 쌓인 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그대로 자리에서 삼키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집밖으로 나가 마당 쪽으로 갔다. 자신이 죽이고, 땅을 파고 , 묻고, 다시 덮은 시체가 묻혀있는 땅 위에 섰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혼잣말로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약봉지를 열었다. 그리고 약을 들이켜려던 찰나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약봉지를 쳐냈다. 정민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죽으려고 그래? 미쳤어?" 효리는 자신의 양팔을 세게 잡고 자신을 흔드는 정민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요 살려줘서"
"살고 싶으면 살아야지 왜 죽으려고 하냐구요.효리 씨 " 그리고 정민은 효리의 얼굴과 이리저리 찢겨있는 옷을 봤다. 이유를 묻자 효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탕아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정민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민은 효리를 부축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정민은 상처 나고 지저분해진 효리를 씻겼다. 어떤 부끄러움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효리 또한 자신을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몸을 내어주는 것에 태연해졌고 다른 남정네들과는 다른 보살핌의 손길에 위로를 받았다. 상처에 바디워시가 닿을 때마다 이상 야릇한 소리를 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마요." 정민이 말했다.
"아파서 그런 거세요. 짜증 나 진짜" 효리는 부끄러운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둘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씻고 나서 밖으로 나와 정민은 곧바로 효리의 상처 난 부분에 약을 발라 줬다. 그때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집 밖에서 들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불러댔다.
"효리야 약사 왔다. 내 밥줄 주인님이 약을 사 오셨네?" 밖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효리는 그 소리가 승모의 목소리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정민의 등을 떠밀며 방으로 떠밀며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정민은 도대체 이게 무슨상관인가 하며 효리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효리가 두 손을 빌며 간곡히 부탁하자 어쩔 수 없는 방 안으로 숨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탕아가 들어왔다
"예쁘게 씻었네? 너 주려고 약사 왔지요?" 탕아는 웃어 보이며 양봉지로 들어 보이고는 효리에게 약봉지를 던졌다. 효리는 어떤 분노노 느끼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소녀였을 때부터 맺어진 상하관계인 탕아와 자신의 관계 속에서 감히 저항하지도 못하고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녀에겐 그것이 죽음보다 더 멀찍한 일이었다. 다신 마주치지 않을 거라고 애써 믿어왔던 지옥이 자신 앞에서 웃어 보이고 있었다. 효리는 이 대화를 듣고 있을 정민을 생각하다 수치스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순식간에 얼굴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뜨거울 정도로 새빨개 졌다. 그 모습을 직관하고 있던 탕아는 자신의 존재가 앞에서 앉아있는 저 나약한 양의 존재를 두렵게 하고, 본인이 그녀에게
위엄을 끼쳤다는 착각에 역겨운 우월감과 쾌감을 느꼈다. 의기양양해진 탕아는 자신이 왜 약을 사 왔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야 너 내일 그 양반하고 약속 잡혔다며. 그 돈 많은 애 딸린 새끼말이야. 회장이라는 놈 너는 어떻게 그런 애를 물었냐? 하여튼 창녀들은 달라도 머가 다르다니까? 끼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르겠다. 하하하하"
"나 이제 그런 짓 안 해 몸 같은 거 안 팔 거야." 효리의 말에 탕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탕아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효리는 감히 자신이 대꾸를 하고 거절하고 있다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하고 있는 불건전하고, 죽지 못해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도 이렇게 말할지는 꿈에도 몰랐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에게 악마 같은 높은 산이 있는데 그의 명령에 감히 거절을 했다는 사실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효리의 말에 탕아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동민오빠 한테말할 거야. 안 하겠다" 효리의 이 말에 탕아는 왁자지껄 벽에 손바닥을 부딪히며 다소 연기하듯이 웃어댔다. 그런 탕아의 모습을 효리는 두렵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웃음을 멈추고 비열한 미소를 띠며 탕아가 말했다.
"야 나 지금 동민이 만나고 오는 중이야. 너 물건하나 잡은 그 회장 놈 그놈이 있는데 너를 놔줄 것 같냐고 하더라. 나 보다 더한 놈이니까. 기대하지 마 넌 절대 벗어날 수 없어"
탕아의 말에 효리는 눈앞이 하얘지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중력이 자신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방에서 소리가 났다. 효리는 정민이 뛰쳐나올 거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효리는 그 순간 직감했다. 정민이 나온다면 자신 앞에 있는 마귀에게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효리는 그 순간 갑자기 '멈춰'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정민이 문밖으로 나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자신이 뱉었던 말을 도로 주어 담으며 당신 뜻대로 하겠다며 당신 노예로 살겠다고 말하고는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당장 나가주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탕아는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으며 말없이 뒤돌아 집을 나섰다. 문너머에서는 정민은 이 상황이 도대체가 어떤 상황인지 어렴풋이는 알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효리만큼이나 느끼고 있었다.
"나와도 돼요." 효리가 말했다. 그 말에 정민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새끼는 먼데요. 먼데 당신에게 저렇게 행동하는 거예요." 정민이 물었다.
효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저 새끼가 이제 제 주인이에요 저는 평생 이 짓거리를 하면서 살아야 돼요. 당신이 어렸을 때 죽인 누나 그리고 그 고통? 웃기지 마요 그따위 어렸을 적 실수는 아픔도 아니에요." 효리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비참함과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었고 또한 정민이 자신 곁에 있다면 분명 해를 당할께 뻔하기에 그를 위해서라도 독하게 말했다. 하지만 효리의 송곳 같은 말에도 정민은 상처받지 않았다. 평소 예민한 자신이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조차 의아했다. 정민은 효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안아줬다. 효리는 유난히도 그의 품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자신도 작게나마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방금 나간 인간은 제가 죽인 이모와 이모부의 아들이에요." 정민은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효리는 말을 이었다.
"제가 본 인간 중에 가장 악질이에요. 그냥 악마 그 자체예요. 처음 저를 이 지옥길에 들어서게 한인 간도 저 인간이에요. 사실 전 저 자식이 죽었으면 했어요. 둘을 죽이고도 항상 마음 한편에 저 인간이 마음에 걸렸거든요. 돈 벌로 미국에 갔다고 했을 때 총에 맞아 죽었으면 하길 간절히 빌었어요. 신께요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네요. 저는 이제 희망이 없어요. 그러니 정민 씨도 이제 저 찾아오지 마세요. 제 곁에 있으면 정민씨가 다쳐요.우리에겐 희망이 없어요"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정민이 말했다.
"죽여요. 죽이죠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죽이자고요" 정민은 알 수 없는 욕망과 목표의심에서 오는 희열을 야트막하게 느꼈다. 그 말에 효리는 정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전에 본적 없는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효리는 곰곰이 생각하니 자신이 사람을 죽였기에 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혹시 자신을 사랑스러운 여자나 여리고 지켜줘야 하는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나 죽이는 비인격적인 괴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는 정민의 손을 뿌리 쳤다. "꺼져버려 나쁜 새끼" 효리는 상처 입은 마음을 씻어내려 독한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정민은 어떤 말없이 그녀를 다시 한번 안아줬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아무 말이나 뱉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처 나가야 해요.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요. 제가 우선 가서 말해요 볼게요."
정민의 말에 효리는 정민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요. 정민 씨 죽을 수도 있어요." 효리의 말에 정민은 그녀를 안심시켜려고 애써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돌아 겉옷을 챙기고 집밖으 나서려 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효리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동민이 그 개만도 못한 놈이랑 대화 좀 하러 가야죠." 정민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효리의 얼굴을 한 번 쓰고 보더니 대문밖을 나섰다.
술집 문 앞에는 가드들이 서있었다. 어느덧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나가라니까. 그런 사람 없다고" 가드들은 덩치들을 앞세워 반말
하며 동민의 지시가 있었다는 게 대번에 티가 날 정도로 이름도 묻지 않아도 정민의 얼굴을 보더니 몸을 밀치며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정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탕아였다. 서로가 얼굴을 알지 못하다 보니 둘 다 낯선 이를 볼 때 흔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시길래 동민이 그 개를 찾으실까?" 탕아는 왜 웃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민에게 물었다. 정민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자의 행색을 보니 천박한 양아치 정도로 생각하다가 갑자기 좀 전의 효리네 집에서 들렸던 목소리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치고는 얇고 무게감 없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정민은 순간 몸이 굳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 자신 앞에 있는 존재에게서 사람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양쪽주머니에 손을 넣고 얼굴을 들이미며 질문하는 탕아에게 한 발짝 물러나며 고개를 피했다. 겁이 났다. 탕아는 정민의 존재를 끝까지 물을 법도 한데 평소 의기소침한 자들을 먼지보다 못하게 여기는 습관을 따라서 무시하고 가드들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들어갔다. 정민은 긴장했는지 식은땀이 등줄기를 흐르고 있었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민은 효리를 피했다. 그리고 효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문뜩 효리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루한 것들이 꿈틀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정민이었지만 애써 그녀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편의점과 집에서 하염없이 밖을 쳐다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저들이 삶을 살게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에 자신을 맞긴 채 시간을 달랬다. 자신의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서 하는 비겁한 도피라는 걸 정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화면을 보니 효리였다. 갑자기 정민의 심장을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왠지 모를 설렘과 귀찮음이 한데섞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받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전화벨이 꺼졌다. 그리고 다시 울렸다. 두 번을 연달아 전화를 건다는 거 무슨 야단이 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일 있어요?"
전화기 너머 메마른 사막을 품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효리의 말에 전화기 속에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사람을 죽였어요." 정민은 정적 속에서 생각을 이리저리 짜 맞췄다. 효리 자신이 죽인 이모와 이모부이야기를 하는 건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 많은 한 번에 정민에 머릿속으로 들이닥쳤다. 정민은 마음을 가다듬고 효리에게 물었다. "효리 씨 무슨 말이에요 천천히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효리가 말했다. "내가 또 사람을 죽였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고의가 아니었어요. 이 자식이 제 목을 조르면서 날 죽이려고 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정민은 효리에게 주소를 묻고 곧바로 택시를 탔다. 효리가 있는 모텔 앞에 도착했다. 정민은 605호 앞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문이 열렸고 효리는 몸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발과 가운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효리는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뜻이 몸을 떨고 있었다. 정민은 초라하고 안색이 파리한 효리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침대 위에 나체로 뻗어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어려 풋이 보였다. 정민은 효리에게 말하고 침대 쪽으로 향했다. 침대로 가까이 갈수록 익숙한 듯한 남자의 모습이 정민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다. 아버지였다. 정민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목에는 과도가 꼳쳐있고 옆 탁자 위에는 사과가 접시 위에 올려 저 있었다. 정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효리는 그런 정민이 걱정이 됐는지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정민은 고개를 돌려 효리를 쳐다보며 "오지 마"라고 맞은편 모텔에서조차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소리쳤다. 효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안 그래도 두려움에 휩싸여 패닉상태인데 정민의 고함에 미치기 일보직적이었다. 정민은 그 자리에서 주먹으로 침대를 치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모종의 혐오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민 자신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고통과 혼란과 비애는 날것 그대로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그는 문 앞에 서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정민은 효리의 서있는 모습에 기묘한 감정과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의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호구로 보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재미가 들린 연쇄살인마가 아닐까?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하는 의심들이
연거푸 머릿속을 강타했다. 하지만 또 다르게 그는 자신 앞에 죽어있는 아버지에 대한마음이 차갑고 무감각하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저 사회가 정한 천륜인 부자지간의 관계라는 관념 때문에 좌절했던 거지 아버지를 향한 사랑 때문에 온전히 슬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비참하고 또한 스스로에게 역겨운 감정을 느꼈다.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느껴지자 갑자기 정민은 욕지기가 올라와 그 자리에서 전날 먹은 것까지 전부 게워냈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효리는 옆에 있던 휴지를 뜯어 정민의 입을 닦아줬다. 정민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효리의 도움 어린 손을 뿌리쳤다. 효리는 다시 한번 모욕과 수치스러움을 느꼈지만 자신을 뿌리친 정민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어째서 왜 저 남자가 저렇게 까지 고통스러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민도 그런 효리를 의식했는지 아니면 효리에게 당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상기시키고 고통받길 바랐는지 모르지만 피투성이로 죽어있는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제 아버지예요"
효리는 자신이 칼로 목을 찔러 죽인 역겨운 중년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정민을 바라봤다. 그녀는 정민이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강하게 압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119에 신고전화를 하는 정민을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구급대원과 경찰이 출동했다. 그녀는 밀랍인형처럼 구급대원과 경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가만히 서있었다. 경찰이 신원조사와 사건의 경위를 묻기 위해 그녀를 불렀을 때도 그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았고 소리도 아주 작고 희미하게 그녀의 고막을 두드릴 뿐이었다. 정민은 경찰의 계속되는 질문에 효리를 쳐다봤다. 그는 혼이 빠져나간 듯 멀뚱히 서있는 그녀가 너무 안타까웠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서 효리가 범인이라고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갓 전입한 초짜 경찰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범인이란 걸 "저 여자가 범인인가요?" 경찰이 정민에게 물었다. 정민은 경찰에 질문에 눈을 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경찰은 눈짓으로 동료경찰에게 효리를 연행하라고 말했다. 효리는 누군가 자신의 팔을 걸고 밖으로 향하는 상황에서도 모든 게 하얗게 느껴졌다. 그리고 방문을 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정민을 쳐다봤다. 그와 그녀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의 공감을 그 찰나의 순간에 느꼈고 그 눈빛 안에는 원망과 용서와 이해화 소속감과 비애 같은 여러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냉정하고 차갑게 흘렀다. 재판이 이어졌고 효리는 재판과정 중에 자신이 이모부와 이모를 죽였다는 사실까지 자백했다. 모든 범행을 시인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분명 정민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인 효리의 재판 증인으로 나선 후 그녀를 변호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쉽게 말해 그녀의 범행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무기징역은 과하다며 그녀를 변호했고 형량을 줄이기 위한 증인으로도 출석했다. 이
사건은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온갖 sns와 미디어에서는 조회수와 구독으로 돈을 벌 요량으로 정민과 효리의 사연을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왜곡되고 변질된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았다. 그리고 정민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이자 본인의 남편을 죽인 여자를 변호한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민은 살면서 세 번째 구급대원을 맞이해야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재판과정을 거쳐 그녀가 겪은 비극과 비애 그리고 학대를 참작해 형량이 40년형이 떨어졌다. 그 사실에 피고 측들은 즉각 법원에 항소를 했다. 두 명의 사람이 항소를 했는데 한쪽은 정민의 어머니 세란이었고 다른 쪽은 효리가 죽인 이모와 이모부의 아들인 탕아였다. 탕아는 역시 자신이 탕아라는 정체성에 어울리게 효리에게 항소를 하지 않을 테니 효리자신에게 남은 재산을 넘겨달라고 했다. 탕아는 효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꽤나 되는 재산을 몰래 꿈쳐 놓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효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든 숨겼었다. 효리는 그렇게 제안하는 탕아의 요구에 교도소 안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탕아는 분노하며 자신의 부모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관심조차 없고 자신의 것인 자신을 위해 일하는 하녀취급이나 하는 여자가 자신을 갖고 논다는 사실에 분통이 일었다.
"출소하고 보자" 탕아는 40년이라는 시간이 자신이 언제죽을지 모른다는 사실과 혹여 40년후 출소하고 찾아갈지라도 지팡이를 짖고 다녀야한다는 깨달 만큼의 통찰력이 결여된지라 아무 말이나 내던지고 씩씩 거리며 교도소를 나왔다.
2년이 흘렀다. 누군가 그랬더랬다. 사람의 일생이란 그저 영원의 한 발자국 정도일 뿐이라고. 영원이라는 시간은 달팽이가 쇠로 된 지구를 돌고 돌아 닳고 닳아서 사라져 없어질 만큼의 시간을
찰나로 취급하는 시간이라고 그러나 영원에 비해 2년은 턱없이 짧았다. 정민에게도 그랬다. 그에게 2년은 미친듯한 지루함과 울적함의 시간이었고 아비가 자신을 다리 없는 새라고 말했듯이 땅에 발이 닿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 같이 붕 떠있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많은 관계를 거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민하고 시니컬한 성경은 다소 유쾌해졌고 사람과의 단절은 공동체가 제공하는 소속감으로 조금씩 채워나갔다. 여자라면 학을 뗐지만 여러 여자들을 거쳐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중 어떤 여자도 정민에게 미래의 화목한 가정을 꿈꾸게 하지는 못했다. 정민은 그 부분에서는 단호했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을 뜨문뜨문 보일 때면 상대여자들은 정나미가 떨어져 떠나가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말고는 정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방법을 몰랐다. 혹여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그는 스스로 확신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호흡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효리 때문이었다.하지만 효리가 교도소로 가고 그는 단 한 번도 효리의 면회를 가지 않았다. 두려웠고 미안한 마음에 도저히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루도 효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 같은 기구한 실패자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랑 비슷한 걸 했다는 게 그에게 있어서 어떤 선물 보따리보다도 값어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효리와의 면담을 예약했다. 2년 동안의 망성임과 머뭇거림은 온데간데없이 효리가 있는 교도소로 향했다. 떨리면서도 무덤덤하기도 한 기분에 정민은 자신의 감정에 의아해하면서도 큰 고민 없이 효리가 기다리고 있는 면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민은 효리의 얼굴을 보자 마치 아이의 얼굴처럼 맑고 환해 보였다. 2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효리는 인상이 환해져 있었고 그녀만이 가지고 있던 우울감은 사라져 있는것 같았다. 정민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곳이 정말 수인들이 갇혀있는 교도소 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요." 정민이 말했다. 효리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표했다.
"오랜만이네요." 효리가 말했다.
" 미안해요 바쁘다는 핑계로 아니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어요. 효리 씨를 만나로 오기가. 다시 한번 미안해요"
정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효리는 정민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에요 정민 씨가 뭐가 미안해요. 제가 더 미안하죠 제가 정민 씨의 아버지를 죽였는데 제 얼굴 보기가 얼마나 껄끄러웠겠어요. 그리고... "효리는 갑자기 말을 하다 멈추더니 어떤 말을 하기 머뭇거려했다.
"저 여기서 출소하려면 38년이 남았어요. 그런데 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네요 신기하게도요. 여기서 저는 많은 걸 배웠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교도소라고 인간쓰레기 들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당연히 그런 사람들도 많긴 하지만.... 여기서 배운 것 중에 가장 큰 깨달음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거였어요. 누구나 그 사람의 인생 뒷마당으로 들어가면 희로애락이 없는 인생은 없더라고요. 저는 저 혼자만 기구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나 혼자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참 한심하고 비겁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됐어요. 나와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민에게 말을 하던 효리는 갑자기 먼가 깨달은 듯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죄송해요 혼자 떠들어 대서요." 효리에 말에 정민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죽은 건 가슴 아프지만 분명 옳지 못한 일을 했고 효리 씨를 헤치려고 했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정민은 의아했다. 아무리 그대로 자유가 뺏긴 교도소가 그녀를 치유한다는 사실이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교도소가 맘에 든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되네요. 효리 씨" 정민이 말했다.
정민의 말에 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금 말했듯이 저는 여기가 편해요. 밖으로 나가봤자 여전히 전 외 로운 섬이 될게 뻔해요. 질투심과 원망으로 평생을 시들어가며 살아야 겠죠. 전 여기가 좋아요. 저화 함께 있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이 저의 것과 비슷해서 그래도 숨을 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정당한 처벌을 받는 거잖아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사람을 죽인 거니까요. 내가 죽인 이모와 이 모부의 시체들이 땅에 묻혀있는 동안 저는 하루하루가 안갯속을 걷는 것 같았어요. 이곳은 철창 속이고 회색빛이지만 그래도 하늘은 푸른색이니까요. 하늘을 볼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어요. 제가 말하고도 저도 정상이 아닌가 봐요" 정민은 미소 지으며 말하는 효리의 모습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리는 나가는 정민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묘한 수치심과 아쉬움이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때 정민이 뒤돌아 물었다. "그 자식은 이제 효리 씨 안 괴롭히죠? 못 괴롭힌다고 해야 하나. 죽은 이모 아들이라는 양아치요. "효리는 탕아를 말하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효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친구가 제 남은 재산 가져갔어요. 효리가 말했다" 효리는 분노로 일그러진 정민의 표정을 보며 정민이 흥분할 거란 걸 알았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쓸데도 없어요. 저는 여기서 죽기진 전까지 살 텐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이상 이 문제를 꺼내진 말아 주세요. 말은 이렇게 해도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요. "정민은 알겠다고 말하며 면회장을 나왔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는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죄인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정민은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연들이 있을까 하며 면회장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구석에는 몸에 온통 문신을 한 남자의 손을 붙들며 우는 아줌마가 보였고 또 다른 곳에는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딸과 그 앞에는 모든 짐과 세상의 풍파를 굳은 표정 안에 숨기고 있는 아버지의 침묵도 보였고 형량이 낮은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웃고 떠드는 20대 초반의 무리 또한 보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정민은 수인들의 있는 소굴 밖으로 나왔다. 다른 세상이었다. 교도소와 그 밖의 경계는 1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동하는 것만큼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왼쪽 배 쪽이 아파왔다. 진통을 가지고 집에 도착했다. 며칠이 지났다. 정민은 편의점을 그만두고 작은 식당을
하나 차렸다. 손님은 최대 세명만 받을 수 있는 작은 초밥집이었다. 요리학원을 갈 용기조차 없는 그는 독학으로 초밥을 배워 장사를 했다. 맛집 까지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손님이 있었다. 세명으로 월세내기도 힘들었지만 정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로 그에게 상속된 유산은 남들은 평생을 벌어도 만지지 못할 만큼의 큰돈이었다. 정민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값비싼 외제차와 집을 사봤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한달 도 채 안 돼서 다 팔고 혼자 살기에 너무 좁지고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집과 중고차로 바꿨다
정민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밖은 면회장을 나오고부터 비가 마구 퍼붓고 있었다. 머리도 채 말리지도 않은 채 정민은 커피를 내려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효리가 생각이 났다. 단 하루도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서 뒤로 물러난 적이 없었다. 애써 관심 없는 척 다른 여자들로 효리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정민의 것과 효리의 것을 같이 공유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만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감과 연대와 사랑과 다짐을 묶는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민은 그것이 필요했다. 이 공허함과 우울감과 붕떠있는듯한 고독을 끊을 수 있는 게 간절히 필요했다. 자신의 존재가 풀어헤쳐져서 무너지기 직전의 자신을 다시 묶을 수 있는 끈은 효리에게만 있다는 강한 확신을 느꼈다. 그렇게 소용돌이치는 잡념과 묵직한 마음으로 시달리며 주말을 보내고 정민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로 향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를 들어 한숨도 못 자더라고 정해진 시간에 가게 문을 열었다.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몇 번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후 다시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그는 철통같이 가게문을 아침 10시에 열었다. 테이블을 최소화 함으로써 좀 더 단순화 했다.가게문도 저녁 8시면 닫았다. 남은 시간은 집에 가서 독서와 영화시청을 했다. 그에게는 일과 휴식이 필요했고 어찌 보면 그에게 있어서 일과 휴식의 균형은 병든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고 정민은 생각했다. 손님에게 나갈 음식재료들을 손질하고 가게를 오픈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3~4명 정도의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앉을 테이블이 적기 때문에 손님 한 명 한 명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다. 손님들의 대화도 정민에게도 잘 들렸다. 다들 각자만의 사연이 있었다. 그들의 사연을 듣는 재미도 정민에겐 하나의 낙이었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누군가는 공무원을 9년을 준비하면서 아침부터 3만 원대의 초밥을 먹는 것이 의아했지만 전화로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해 성질머리를 내는 공시생도 있었고, 어떤 할아버지는 허름한 모습으로 초밥을 먹으러 왔는데 알고 보니 가게 근방의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정민은 그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지 않고 초밥과 따뜻한 국물을 대접했지만 갑자기 할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면서 자신이 땀 흘려 번돈으로 멋있게 사 먹는데 사장 당신이 먼데 자신에게 적선을 하냐며 화를 내는 마당에 적잖이 당황한 적도 있었다. 또 단골케이스는 불륜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중년의 여성과 남성이 인근모텔에서 불륜을 저지르고는 서로 초밥을 먹여주면서 누가 보면 잉꼬부부인 줄 알정도로 므흣한 분위기를 풍기며 식사를 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상대방 배우자의 대한 험담과 자식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시부모와 장인장모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들이 대화의 주된 재료였다. 정민은 이런저런 사람들을 관찰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침시간이 조금 지나 다들 회사로 출근을 하고 손님이 없을 때 밖으로 나가 내리치는 햇살에 기지개를 켰다. 그렇다고 웃음과 개운함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상태가 시체처럼 무기력한 상태까지는 아니라는 정도라는 인식을 하는 정도였다. 그에게 햇빛과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인 부, 건강은 크게 와닿지 않는 주제들 이었다. 점시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북적거렸고 그날은 웬일인지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가게를 찾아왔다. 점시시간이 지나 오후 세 시쯤이 되자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내린다고 했다. 다른 가게 사장들처럼 비가 오면 손님이 끊길 걱정 때문에 골머리를 아플 일이 없는 정민에게는 큰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이윽고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가게밖으로 나가 처마 아래서 빗소리를 들으며 앞에 있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잔잔하게 효리의 얼굴을 그려냈다. 긴 생머리의 효리, 단발의 효리를 생각하다가 스님처럼 빡빡머리의 효리를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빗소리에 "아무렴 어때 뭘 해도 이쁜데" 라는 정민의 혼잣 말이 섞여 비와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장대비가 멈추고 이슬비가 내리자 정민은 갑자기 고양된 기분을 통해 오늘은 한 시간 더 늦게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저녁시간인 8시에 퇴근한다고 손님들의 원성 아닌 원성을 들었기에 한 시간 늦게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센 비가 그치가 웨이팅이 사실상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가게 앞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지고 마지막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가족인 듯했다. 정민은 이쁜 꼬마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 꼬마 남자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그들만이 아는 재미진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정민의 시선은 아이들에게서 아이들의 엄마로 이어졌고 그다음 아이들의 아빠로 이어졌다. 그리고 정민은 그 순간 누가 자신의 머리를 도끼로 강하게 내리찍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탕아였다. 그였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치고 싶고, 보고 싶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보다 더한 연민이 모든 걸 덮어주고 안아주고 싶은 효리를 그 지옥으로 만들고 심지어 얼마되지 않는
그녀의 재산을 전부 갈취한 인간말종의 탕아였다. 정민은 하염업이 탕아와 그의 가족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민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 냉수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리고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빛이 자신이 손질하는 광어빛깔보다 더 하얘졌다. 탕아와 그의 가족들이 가게로 들어오자 정민의 심장은 온몸이 진동할 정도로 쿵쾅거렸다. 다른 가게로 갔으면 하는 생각과 모종의 호기심이 들어 그를 자세히 살피고 그의 대화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정민은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른둘 아이둘이세요?" 정민은 자신을 알아보면 보는 거고 아니면 아니라는 생각을 애써 가지며 탕아의 시선을 보고 질문했다. 탕아는 옆에 붙어있는 딸의 머리를 매만져 주며 대답했다. 정민은 미소를 지어보인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초밥을 만들러 갔다. 탕아의 가족들은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단란하고 화목해 보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말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녀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말투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다정했다. 정민은 혹시 이 남자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그가 효리에게 했던 만행과 비겁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 앞에 앉아서 가장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가 가증스럽고 역겹게 느껴졌다. 그때 탕아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한번 보더니 잠까 통화하고 온다고 말하며 정민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정민은 가게 뒤편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화장실 열쇠를 건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열쇠를 건네받고 가게 안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정민은 탕아를 따라나가서 통화를 엿듣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올라왔다. 혹시나 탕아의 본모습이 저 통화를 통해 드러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가게밖으로 나가 탕아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그때 화장실 안에서 다소 큰 탕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고 정민은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의 내용을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정민은 은연중에 그가 여전히 비열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야 너 이번건 제대로 처리 안 하면 너하고 니 새끼들하고 남편 그리고 니 어미아비랑 니 시부모한테 다 까발릴 거야 알겠지? 그럼 어떻게 될까? 넌 자살밖에 답이 없이. 네 부모도 낯짝 들고 다닐 수 없을걸? 하하하 네 가족들은 산산조각이 날줄 알아 알겠어? 빨리 약 처먹고 튀어나가 우리 물주님이 널 기다리시니까. 아 맞다 사장님이 너 보고 향수 좀 적당히 뿌리래 역겹다고 알겠어? 대답 안 해?.... 그렇지 그래야지 끊어"
정민은 알 수 없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화장실 안에서 탕아가 나왔다. 정민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탕아를 마주쳤다. 탕아는 얼굴을 보더니 가게사장인걸 알고는 방금 전까지 화장실 안에서의 타고난 냄새나는 본성을 회칠한 무덤처럼 숨기고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정민을 향해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지나쳤다. 정민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 뒤를 쫓아갔다. 결승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선수처럼 당찬 걸음으로 가게 안을 들어가는 탕아를 뒤쫓았다. 그리고 먼가에 홀린듯 가게옆 보수공사 중인 건물 옆에 있던 단단한 쇠파이프를 들었다. 별안간 정민은 가게문 앞에서 문을 열려는 탕아의 머리를 그대로 가격했다. 가게 안에서는 탕아의 아내와 아이들 그 장면을 봤고 비명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가게 밖에서 비가 그쳐 하나둘씩 나온 행인들도 그 장면을 쳐다보며
핸드폰를 꺼내 하나둘씩 신고를 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민은 중얼거리며 쇠파이프로 계속해서 탕아의 머리를 가격했다. 어떤 누구도 뭉개진 탕아의 얼굴을 보며 사람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수선해진 주변사이로 사이렌이 울리며 경찰차과와 구급차가 도착했다. 하늘이 갰고 같은 하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햇빛이 지면을 내리 째고 있었다. 정민은 경찰에 연행되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불현듯 그는 효리의 얼굴을 떠올렸고 마음에 들어찬 똥덩어리들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법원은 정민이 죽인 탕아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쳤고 워낙 악질에다가 조사 중에 사람을 죽인정황까지 파악되었다. 언론에서는 정민을 영웅이라며 팬카페까지 생겼다. 정당방위는 아닐지라고 무기징역은 과하다는 분위기가 생성됐고 법원도 압박을 받았는지 30년형과 항소가능성을 열어놨다. 하지만 정민은 항소하지 않았고 그 사실에 만족해했다. 정민을 면회온 엄마는 자신의 아들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듯한 편안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말투며 행동도 부드럽고 여유 있어 보였다.
세란은 그런 정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니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했어"
정민은 잠잠이 웃으며 말했다.
"살아야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혼자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