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것, 너의 것 그리고 우리의 아홉번째

by 박환희

효리가 얘기를 끝나자 정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칼을 바라봤다. 곧바로 효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효리는 정민에 혹시나 하는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

정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함부로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깔아뭉개는 바위 부모에게서 도망쳐 왔건만 더 큰 짐을 떠안은 느낌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정민은 자신 앞에 앉아있는 여자의 논리를 곱씹어 봤다. 다른 건 차치하고 사람을 죽인 죄책을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있냐는 논리였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는 끄덕여졌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효리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정민은 속으로 완전한 건 없어,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거야, 법이 무엇을 할수있어, 정치인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다들 자기 먹고살기 바쁘면서 누굴 이해한다거야 등등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뇌리 속에 누군가 툭툭 던지는 질문들과 싸우고 있었다. 정민은 짧은시간 동안 온정신을 쏟아서 그런지 현기증이 느껴졌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효리는 당황한 듯 앉아서 정민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먼가 상처 입은듯 보였다. 자신을 괴물취급하고 떠날 것 같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신고해도 돼요" 효리가 말했다.

"직접 하지 그래요" 정민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효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정민은 심술이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제가 대신 신고해 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렇죠?" 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정민을 길을 걸었다. 그냥 걸었다. 집안에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배알이 꼴리게도 날씨는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하늘이 자신과 효리를 버렸다는 생각이 무심하게 정민을 스쳐 지나갔다. 정민은 그녀가 가여웠다. 몹시도 가여웠다. 그녀의 짧다면 짪은 인생은 그녀의 존재를 곪 삭게 했다. 그는 문뜩 안개 끼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드리운 인생이 그녀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것과 정민 자신의 것이 결은 다를지라도 비슷하다는 생각에 묘한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정민에게 걸리는 문제는 그녀의 집 마당에 묻혀 있는 시체 두구였다. 정민은 애써 그 인간말종 두 명이 세상에 없어져서 더욱 세상을 윤택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데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 여기며 논, 밭에 잡초처럼 제거하는 게 세상에 이치에 부합한다는 그럴듯한 자기만의 논리를 펼쳐봤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갔다. 먼가 붕떠있는 듯한 느낌을 간직한채 거리를 걷고 또 걸어서 어떤 자리에 멈춰 섰다. 멈춰 선 곳에서 고개를 들어 건물 입구에 '경찰서'라고 적힌 글귀를 봤다. 정민은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두 손을 뺐다. 그는 경찰서 유리문을 초점 없이 바라봤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움직인다면 상황은 모든 게 끝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게 옳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을 떼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경찰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분명했지만 모종의 요소들이 자신을 뒤에서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발을 뗐다. 유치하지만 경찰서 앞에 적힌 '정의'라고 적인 글귀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정민의 어깨를 감쌌다. 정민은 얼굴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의 힘이 묵직한 걸

느낄수 있었다. 그때 마침 안에서 정민을 발견하고는 경찰 한명이 경찰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정체를 알수없는 묵직한 손은 정민을 낚아챈 다음 경찰서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정민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해하며 자신을 낚아챈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키는 자신보다 컸고 덩치도 꽤나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효리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 애가 뭘 잘못했는데"

정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 남자도 비밀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어깨를 아직도 힘을 줘 잡고 있는 상황해 불쾌감을 느꼈다

"우선 손부터 치우고 말씀하시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정민의 말에 정민의 얼굴을 쓱 한번 쳐다보더니 어깨에서 팔을 내렸다.

"누구시죠" 정민이 물었다.

"효리 삼촌입니다. 진짜 삼촌을 아니고 효리가 다니는 회사 대표죠. 바닥에서부터 올라와서 내 회사 하나 차렸죠" 정민은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 자랑을 하는 이 남자를 보고 별안간 실망감이 들었다. 진지하고, 무겁고 진지한 상황에 먼가 철없는 어른이 낀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효리는 술집에서 몸을 팔아 돈을 벌고 있었고 그 회사에 대표라면 술집 사장 아닌가? 그냥 넘어가도 됐지만 정민은 이 옆에 남자에게 모욕감을 주고 싶은 욕구가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이유는 자기 자신도 몰랐다.

" 그럼 술집에서 포주인 거네요?"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정민은 적잖이 당황했다. 고개를 살며시 돌며 자칭 효리의 삼촌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괜한 만을 했다는 생각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문뜩 왜 자신을 경찰서에 들어가는 걸 막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왜 제가 경찰서에 들어가는 걸 막으신 거죠.? 이유가 뭐예요?" 정민이 물었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난 알고 있으니까" 동민이 대답했다.

정민은 그 대답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만 알고 있는 고민을 누군가와 나눠갖는다는 건 까무러칠 일이니까.

정민은 이미 저 남자와 자신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뭘 알고 있는데요"

"효리"

"효리 씨 뭐요"

동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정민은 동민의 표정에서 머뭇거림과 껄끄러움을 선명하게 봤다. 동민은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땅 속 시체들" 정민은 동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죠" 정민이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대답해 주세요"

"우연히 봤어. 문 앞에서 시체를 묻고 있는. 그리고 그 시체얼굴도 봤고. 내가 알던 얼굴들 이었어"

정민은 호기심히 느껴졌다. 그리고 불쾌한 질투심히 느꼈다. 자신만이 효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누구보다 거 가련한 여자를 지켜주는 존재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건만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누가 봐도 얼굴은 훈훈하게 생긴 이 중년의 남자가 효리의 비밀과 그녀가 죽인 이모와 그녀의 남편과도 일면식이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요" 정민이 물었다.

"너부터 말해 난 말해줬잖아"

"반말하진 마시고요"

동민이 피식 웃었다.

"효리 씨가 말해줬습니다.됐죠?" 정민이 대답했다.

동민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들짝 놀라 정민을 쳐다봤다. 정민은 우월감에 므흣한 감정을 느꼈다.

"미쳤네 그년도 미쳤어. 어휴 답답합년"

그때 정민은 갑자기 자신보다 키가 20cm 가까이 차이나는 동민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년 년 하지 마 당신이 뭔데 함부로 말해 넌 도대체 뭐 하는 새낀데 설쳐"

동민은 가소롭다듯이 정민을 내려보며 말했다. "그럼 넌 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거야 어? 남자친구야? 언제 봤다고 효리랑 그렇게 친한 척이야"

정민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동민은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정민은 민망한지 앞을 쳐다보며 걸었다. 먼저 앞서가는 정민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동민은 입고리를 살짝 올리며 따라갔다.

그렇게 둘은 말없이 걷다 정민이 먼저 운을 뗐다."대답 안 해줬잖아요"

"뭘" 정민이 궁금하다듯이 동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효리 씨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 그러니까 효리 씨가 해치운 그 사람들과의 관계요"

" 뭐긴 뭐겠냐. 서로 비즈니스로 만났지. 네가 아 맞다 참네 당신이... 잠깐 우리 서로 통성명이라도 합시다. 거참 서로 이렇게 된 것도 멋같은 인연인데 나는 동민이야 박동민"

" 저는 김정민이요. 민짜 돌림이네요" 정민이 갑자기 쓸데없는 멘트를 날렸다. 정민은 평소 자기답지 않는 태도에 스스로 놀라면서 민망해했다.

그런 모습에 동민은 피식 웃었다. 그다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마저 말을 했다.

"나도 우선 말부터 놔도 될까요? 내가 가방끈이 짧아 예의범절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딱 봐도 나보다 나이도 어린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요?" 정민은 좀 전과는 다르게 흔쾌히 허락했다.

" 무슨 말을 꺼내야 될까 음 벌써 겁나는데. 효리가 사람을 죽인 건 알고 있지?"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소름 끼치게 자기 집 앞마당 흙속에 있잖아" 정민은 동민의 필터 없는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 말이 없어. 정말로 나도 몇 년이나 지나야 알았어. 그리고 효리가 미성년자라는 것도. 알고 보니 그인간네들이 위조 신분증을 가져왔더라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이런 더러운 일 하면서 먹고살고 있지만 상도덕은 지키자는 게 내 철칙이거든. 그런데 이 인간말종들이 효리가 미성년자인걸 알고 술집에서 고용했다고 신고한다고 협박하더라 나도 어쩔 수 없었지 돈도 몇백 뜯겼지 그런데 그러든 말든 내가 성격이 왈가닥 해가지고 감방 가면 되지 했는데 효리 걔가 참 불쌍하더라. 그 애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여기 술집 여자들 중에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는데 효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구한 팔자더라고. 그래서 마음이 더 갔지"

"그러면 효리 씨가 사람을 죽인 걸 알고 처음에 어땠어요?"동민의 얘기가 계속해서 듣던 중 갑자기 정민이 물었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잘 모르겠지만 뭐랄까 이사실을 덮어두는 게 이 부조리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저 여자에 대한 작은 선물이 아닐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 거 잘 아는데 너무 짠하잖아. 솔직히 이 세상에 더럽고 있으나 마나 한 인간들 천지 아니야? 그런데 그런 인간들 둘 사라진다고 세상 어떻게 되나? 그 둘 사라지니까 효리가 그나마 숨이라도 트이지 않겠냐 이 말이야. 내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난 그냥 못 본 척하면 되는 거야. 양심의 가책 같은걸 내가 느낄 필요가 없어.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또 죽은 인간들도 뿌린 대로 거둔 거고. 안 그러냐?"

동민의 말에 정민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분명 나름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췄지만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동민도 정민의 고심하는 표정을 보고 눈치챘는지 되려 질문을 했다.

"너는 어떤데. 네가 그렇게 신고하고 싶다면 이젠 말리지 않을게 진심이야. 내가 무슨 권리로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게 세상이치니까. 하지만 적어도 난 그냥 못 본 척할래. 효리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몰라. 그래서 좀 전에 그렇게 놀랐던 거야. 그걸 자기 입으로 말했다는 게 도대체 믿기지가 않으니까 그것도 서로 알게 된 지 별로 되지도 않는 남자한테."

동민의 말에 정민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효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줄곧 무표정한 얼굴에서 이따금씩 퍼지는 미소가 정민의 생각을 스쳤다. 별안간 자신의 누나 혜민의 얼굴이 겹쳐져서 떠올랐다. 정민은 갑자기 악 소리를 내고 연거푸 악소리를 냈다. 그때 길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둘에게 다가왔다. 동민은 갑자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어떤 연유인지 묻는 경찰에게 아들이라고 말하며 틱장애를 앓고 있다고 둘러댔다. 동민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좀 전부터 쌓여왔던 언짢은 정민의 태도를 되갚아주기 위해 경찰들이 보는데서 갑자기 정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정민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동민을 쳐다봤다.

"뭐 인마. 어디서 아빠를 째려보고 있어" 동민은 통쾌함과 쾌감을 한껏 즐기며 동방예의지국에서 가져야 하는 손아랫사람의 태도를 넌지시 알려줬다.

경찰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자신들이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폭력은 자제해 달라는 형식상 말만 하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동민은 혹여나 이들과 엮어서 불법으로 운영 중인 술집과 성매매 업소가 걸릴까 걱정되어 빨리 경찰이 떠나가길 기도했다.

경찰이 가자 동민은 정민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흥얼거렸다. 정민은 어찌 됐든 자신이 악을 질렀고 갑작스러운 상황을 모면했기에 화는 났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정민이 말했다.

"신고 안 할래요. 아니 모르겠어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무슨 자격이 필요해" 동민은 정민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정민은 동민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 숨기고 싶은 과거, 죽고 싶게 만드는 과거이야기를, 자신도 효리와 다를 바 없는 가족 살인범이라는 걸 말할까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있어요"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처음 만났던 경찰서 근처 공원이었다. 동민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가게일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둘은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정민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마냥 무겁기만 한 기분은 아니었다. 왠지 친구가 생긴듯한 느낌이었다. 무게감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동민에게는 나름 진지함과 타인을 연민으로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정민은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정민에게는 어른이 자신의 인간관계속에 들어온 것 같아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효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일주일이었다. 먼저 그녀를 찾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가게 문이 열리면 혹시나 그녀가 왔을까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동민또한 궁금했다.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먼가 머릿속이 효리로 가득 찬 일주일이었지만 또한 마음 한구석은 잔잔한 파도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퇴근시간이 되어 정리를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집 앞 마트에서 음식을 조금 사들고 원룸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정민은 마트에서 장을 봐온 비닐봉지를 손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과일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여기에 왜 있는 거예요. 현관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정민이 물었다.

효리는 그런 정민을 지긋이 바라봤다. 정민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에 표정과 안색, 느린 동작과 풀린 눈을 보고 그녀의 사연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민은 효리를 일으켜 부축하고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그녀를 한번 흘깃 쳐다봤다. 효리는 힘이 빠진 나머지 정민에게 기댄 채 눈을 감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섰다.

분명 연인도 아닌데 정민은 이 상황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마치 아내와 남편처럼 익숙하게 매번 해오는 일상 같았다. 같은 공간 안에 누군가와 있으면서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받은 것은 정민에게 그 사고직전 어린 시절 말고는 없었다. 정민은 유난히도 힘들고, 지쳐있는 효리의 모습에 안타까운 감정과 불일듯한 연민을 느꼈다.

" 오늘따라 더 지쳐 보여요. 괜찮아요?"정민이 말했다.

"어떤 미친 인간 한 명이 저만 찾아요. 더럽고, 서럽고, 교만하고, 악에 받치고, 천박함을 저에게 풀더라고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네요"

정민의 침대에 누워 산송장처럼 누워있는 효리는 발끝부터 힘을 모아 대답했다.

그 말에 정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그만하겠다고 하세요. 사장한테"

효리는 정민의 말에 소리 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민을 보고 말했다.

"저 같은 역겨운 사람은 그런 일도 감사해야 할걸요. 저 같은 존재는 그런 걸 따진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일 거예요 세상에 물어보세요. 저 같은 존재에게 대답조차 사치라고 느낄 거예요. 저 같은 존재에게는. 끊을 수가 없는 거죠." 효리에 말에 정민은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끊고자 정민은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가 끝날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효리는 지치고 미친 듯이 피곤했지만 허기진 배는 그녀의 숙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민은 효리가 좋아한다고 했던 김치국수를 뚝딱 만들었다. 거기에 프랑크 소시지와 계란 프라이도 있었다.

정민과 효리는 바닥에 앉아 요리를 허겁지겁 먹었다. 상은 없어요? 효리가 물었다. 정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건 사치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효리의 모습에 정민은 뿌듯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동시에 혹시내 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연거푸 들었다.

"천천히 먹어요. 안 뺏어 먹으니까"

효리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신의 뱃속에 서서히 거의 씹지 않고 삼킨 음식들로 채워갔다. 음식을 다 먹고 효리가 정리를 하려는데 정민은 자신이 하겠다며 잽싸게 상을 치워 부엌으로 들고 갔다. 부엌이라고 해봤자 몇 발자국이면 도착하지만 말이다.

설거지를 하고 정민은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효리는 밥 먹고 바로 누워있으면 안 된다는 옛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정민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고 머뭇 거리는 것 같았다. 정민은 그런 효리를 보고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과일" 효리가 대답했다. 효리의 대답에 정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 과일 안 먹어요"

"왜요?" 효리는 궁금해 물었다.

"누나 때문에요"

효리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있는데 먹을래요?"

"네. 어떤 맛인데요"

"다 함께요"

정민의 말에 효리는 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그들은 디저트를 먹고 효리는 침대에 누워 뻗었고 정민은 그런 모습을 소파에서 살며시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정민이 먼저 깼다. 효리의 전화기였다. 화면에는 포주새끼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웃는 이모티콘도 함께 표시돼 있었다. 정민은 당연지사 동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정민은 효리가 깰까 봐 잽싸게 전화기를 들어 무음으로 만들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피곤에 절어서 벨리 울려도 효리는 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때 효리가 일어났다. 운 좋게도 상막한 원룸에서 옅은 햇빛이 드리웠고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정민을 봤다. 뚫어지듯이 정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민은 민망함에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피식 소리와 함께 효리가 웃자 정민도 다시 시선을 효리에 미소로 옮겨 둘은 방에 드리운 햇빛이 질투가 날 정도로 서로의 관심을 느꼈다.

"데이트해요" 질문이 아닌 선언 같은 말투로 정민이 말했다.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민망함에 효리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아무 말이 없자 정민은 고개를 살며시 옮겨 효리의 표정을 봤다. 효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정의할 수 없는 설렘을 가진채 또다시 잠이 들었다. 더 이상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함이 풀리자 이제 연인이 된 둘은 무작정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데이트 코스에 대해서 정민과 효리는 대화나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둘에게 있어서 그저 남들처럼 남녀가 데이트를 한다는 그 사실이 설렘이었고 새로움이었으며 자신들도 외따로 존재하는 빙산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대지를 밟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은 나란히 원룸을 나와 길을 걸었다. 마침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둘의 데이트를 안내해주는 것 같았다. 정민은 길을 걸으면서 힐끔 효리의 얼굴을 봤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의 코가 이뻤다. 오뚝했다. 새하얀 피부는 아니었지만 이목구비와 잘 어울리는 구릿빛 피부였다. 키 또한 다른 여성들보다 살짝 큰 편에 속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민은 효리의 외적인 것보다 그녀의 아픔을 사랑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픔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그녀의 속사정과 사연이 자신만 회색지대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겁하지만 퍽 위로가 됐다. 못난 생각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 따위는 정민에게는 없었다. 왜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 다가가기 힘든 존재, 성질이 더러운 존재, 친해지기 싫은 존재, 예민한 존재로 여겨지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정민을 다시 한번 위로했다.

"멀 그렇게 힐끔 거리면서 봐요. 그냥 대놓고 보지 그래요? " 효리가 앞을 주시하며 땅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정민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영화 보러 갈래요?" 정민이 물었다. 효리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 근처에 노촌극장이 있는데 여느 영화관이랑 다르게 옛날 느낌을 풍기면서 분위기도 색다르더라고요."

"영화 좋아하나 봐요. 누구랑 갔는데요?" 효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그렇게 둘은 바짝 붙어서 영화관으로 향했다.정민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효리를 보고 이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쁘다는 말에 까무러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물건취급하고, 영혼이 없는 살덩이로 여기는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자로 여겨주는 것 같아 므훗한 감정을 느꼈다.


갓 풋풋하고 서툰 연인이 된 둘은 흔하디 흔한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소제인 공포영화와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나름 기대했으나 남은자리는 전혀 흥미 없는 SF장르 영화였다. 둘다 지독하게도 영화가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고 어떻게 잡은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표를 예매하고 효리는 팝콘과 콜라는 자신이 사겠다며 점원 앞에 섰다. 점원의 얼굴은 앳된 보였고 피부는 새하앴으며 밝고 사랑스러웠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일반팝콘하고 콜라 두 개 부탁드려요" 효리는 의자에 앉아있는 정민을 돌아봤다. 정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빠른 솜씨까지 겸비한 여자 직원의 업무능력으로 금세 주문한 팝콘과 음료가 나왔다. 음식을 받고 그녀는 다시 한번 점원을 바라봤다.

별안간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점원은 다소 당황했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효리의 얼굴을 보더니 친절한 말투로 필요하신 게 있냐고 물었고 효리는 고개를 저으며 음식을 들고 정민에게로 갔다. 팝콘과 콜라를 정민에게 건네주고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효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변기 커버를 내리고 문을 잠그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자신 앞에 있던 또래의 젊은 여자 직원 앞에서 자신이 들었던 생각과 감정을 곱씹었다. 효리는 그녀 앞에서 깊은 자격지심과 자기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겠다며 뿌듯해한 팝콘과 콜라는 자신이 몸을 팔아 산 음식이라는 것에 수치심과 모욕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마치 생색이라도 내는 듯이 자신이 산다고 했던 그로 인해 느껴졌던 미세한 뿌듯함에 가슴을 칼로 찌르고만 싶었다. 또한 젊은 직원에 대한 질투심도 느껴졌다. 저 여자는 나처럼 비극적이지 않았기에 저렇게 밝게 일할 수 있고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남 들다 하는 알바를 하고 있는 거라며 자신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지독하고, 견디기 힘든 열등감을 몰아내고자 자신 나름의 전략을 썼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분통이 났다. 별안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비극적 이게도 인간의 머리는 그 찰나에 순간에 인생을 헤아릴 수 있었고 평소에는 없던 고약한 통찰력을 발휘했다. 이윽고 평소에 몸이 좋지 않은 효리에게는 무리가 왔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비현실감이 느껴졌으며 약간의 욕지기가 올라왔다. 언제까지 화장실에 있을 수 없으니 숨을 가다듬고 세면대 앞에서 냉수로 얼굴샤워를 했다. 울었다는 사실을 정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은 물이 흥건한 채로 나갔다. 화장실을 나오는

얼굴과 앞머리가 물이 흥건한 효리에 모습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정민은 화장실을 나오는 효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민은 눈이 빨개진 효리를 봤다.하지만 이유는 묻지않았다. 첫 데이트를 한 이 커플은

SF영화를 상영하는 6관으로 갔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효리는 기분이 꽤나 괜찮아진 것 같았다.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민은 효리의 안색을 살피고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효리는 정민의 말에 민망했는지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정민의 평소 자신에겐 없는 힘찬 말투로 말했다. 효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커플들처럼 돈가스를 자르며 길거리의 솜사탕을 먹으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정민은 누나와의 추억을 이야기했고, 효리는 부모님과의 여행이야기를 했다. 둘은 마치 손을 잡고 서로의 기억 속으로 여행하는 것만 같았다. 둘은 낯설기만 한 편안함을 느꼈다. 세상은 살만하고 자신들이 너무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야트막하게 그들 머릿속을 멤돌았다. 어느덧 저녁놀이 지고 사방이 어둑해지는 시간이 되자 둘 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사실상 첫 데이트였고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귀한 만남이기에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효리는 달뜬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애써 땅에 묻혀있는 시신 쪽 방향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감나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을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두 한켤레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남자구두였다. 효리는 혹시 동민이 왔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효리는 갑자기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존재를 숨이 멎었다. 손이 떨리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탕아였다. 탕아가 온 것이다. 효리는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탕아를 보자마자 마당에 묻혀있는 탕아를 낳은 아버지, 어머니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야 너 여전하구나. 역시 끝내주네" 탕아는 능구렁이 같은 혓바닥과 불쾌하게 살이 찐 모습으로 효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머리카락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몇 가닥 남지 않고 죄다 뽑혀있었다.

효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왜 왔어요?"

"왜 왔어요? 내가 못 올 곳 왔냐? 내 부모집인데 내가 못 올 곳 온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아 내가 누군지 몰라?"

효리는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회칠한 무덤처럼 고상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는 척했다면 지금 자신 앞에 서있는 남자는 그런 태도와는 담을 쌓은듯한 태도였다. 효리는 방금 전까지 천국을 맛보고 왔는데 순식 간에 지옥이 그녀의 삶을 덮쳐 버린 것만 같았다. 역시 나 같은 건 죽으라고 태어났나 봐. 이럴 거면 왜 난 태어났지. 지옥만 맛보고 살아야 하는데. 아 힘들다. 왜 나한테만... 그녀는 회환과 자기 연민에 빠져 지옥에서 온 주문을 외웠다.

" 당신 집 아닌데요"효리는 강하게 나갔다.

"뭐? 당신? 어이구 너 많이 컸다. 너 동민이가 그러던데 너 감방 갔다 왔다며. 대단하다 대단해 역시는 역시인 게 아직도 몸 팔고 있다며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거 말고 뭐 있겠냐? 할 줄 아는 게 그런 것 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아주 가지가지

한다 진짜" 탕아는 자신의 외관과 결을 같이하는 천박함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 효리의 이 말을

듣자마자 탕아는 몸을 일으켜 욕을 지껄이며 효리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어서 머리를 문지방에 다섯 번 강하게 부딪혔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효리에게 내던졌다. 조금의 망설임과 혹여나 죽거나 피가 나진 않을까 하는 고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탕아는 대대체 멀 먹고 살았는지 풍만한 뱃살이 무색하게 벌써 지쳤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이윽고 털썩 주저앉고는 다시 힘겹게 일어나 문쪽으로 갔다. 효리의 발에 걸리자 자신의 둔함을 탓하지 않고 죄 없는 효리를 한 번 더 걷어차더니 바닥에 있는 효리에게 말했다. " 다음에 왔을 때 이딴 식으로 대접해 봐.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날 왕으로 생각해 왕 알겠어? 네가 앞으로 모셔야 하는 왕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탕아는 밖으로 나가던 찰나에 마저 할 말이 있는지 몸을 틀어 효리에게 말했다. "야 그리고 노친네들 어딨냐? 전화를 안 받는다. 그리고 아까 전에 왜 당신 집 아니라고 했냐? 그럼 네 집이야? 내 부모집이니까 내 집이지 안 그래? 노친네들

어딨는지 몰라? 연락오면 전화줘라 "

효리는 그때 왜 그랬는지 자신도 모른다. 그는 시체가 묻어있는 땅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향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타는듯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탕아는 효리의 시그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효리를 개닭 보듯 하더니 혀를 차며 효리의 집을 빠져나왔다. 효리는 서러웠다. 서러워서 울었다. 한없이 울었다. 그 울음이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듯이 울었다.

여러 가지 회색빛 감정들이 효리의 마음에 밀어닥쳤다. 효리는 안간힘을 내며 핸드폰을 찾았다. 정민에게 연락하려고 고통에 힘겨워하는 몸을 이끌고 식탁 위에 있는 핸드폰의 최근통화 화면을 띄었다. 그곳에는 동민과 정민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는 대출전화뿐이었다. 그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효리는 비참함을 느꼈다. 효리는 정민에게 전화를 거려는 찰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이뻐 보이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었다. 여자란 전쟁통 속에서도 미를 뽐내고 싶어 하는 존재 아니던가. 그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 동민이였다. 효리는 전화를 받았다.


"아까 그놈이야. 한 시간 뒤에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그놈 콘셉트 알지? 거지꼴?늦지않게 준비해"

어느새 동민의 말투가 투박해져 있었다. 그러나 효리는 큰 감흥이 없었다. 효리가 대답이 없자

동민은 계속해서 효리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흐른 후 효리가 대답했다.

"도와줘"

동민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여태 참아왔고 외면해 왔던 마음속 양심이 도끼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일이 싫었다. 누군가를 이용해 돈을 벌어먹고산다는 사실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동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자신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따금씩 자신에게 하소연하는 여자들에게 역한 마음이 드는 자신의 감정을 느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이번에 유난히고 충격으로 다가왔던 사실은 애써 외면했던 그리고 따뜻함을 가장했지만 돈이 먼저였던 효리에 대한 연민이었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오던날 자신을 누군지도 인지하지 못한느 갓난아기였던 동민은 허름한 고시원에 버려졌다.

어느새 그 고시원에서 아이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문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보면서 자신들 또한 보통의 여자들처럼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버려진 아이로 대신해서 풀었다. 남편의 넥타이를 메주고 아이들을 등교시켜 주는 일을 자신들과는 먼 나라 이야기였기에 여자가 본디 가지고 태어나는 모성애를 이름 모를 아이로 풀었다. 이름은 단순히 고시텔 건물주의 이름을 따서 만들 동민고시텔에서 따와서 지었다. 동민은 커가면서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학부모 모임에서는 여느 아이들과 같이 삼촌과 이모가 아빠행세를 했었고 이모들의 외모가 뛰어나다 보니 친구들과 친구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동민은 부모님의 직업소개란에 물류사업 이라고 적었다. 포주인 삼촌이 물류라고 적자 옆에 있던 직원 아가씨는 자신이 물건이냐며 따졌지만 동민은 그게 무슨 말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물정에 밝아지면서 부모행새를 하는 삼촌과 이모들을 보면서 자신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숨겨야 하는 존재들 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까지 오게 되었고 가출과 일탈은 연례행사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이모와 삼촌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간섭하는 게 동민은 죽기까지 싫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중에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갔다. 나이 든 여자들은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아 자신의 존재를 손바닥 위에 있는 미생물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포주역할을 하던 동민을 유난히도 이뻐한 삼촌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가 자살을 함으로써 그녀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현실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동민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삼촌들을 따라다니면서 여자들과 그들을 통해 욕정을 풀려는 변태들을 엮어줌으로써 돈을 버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 쪽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게 있던 터라 일을 수월하게 해 냈고 반항아 기질도 있었지만 다소 능글맞은 구석도 있던지라 주변사람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동민의 발바닥에 굳은살이 배길정도로 발품을 팔아 사업의 규모는 눈에 띄게 커지게 되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대단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자신이 사지멀 정하게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이모들과 삼촌들에게 두툼하게 봉투로 은혜를 갚았다. 또한 본디 심성이 착한지라 몇몇에게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이 업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얼굴도 곱상해서 빚을 갑아준 동민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이 자주 있었지만 동민은 자신의 인생은 가정을 이룰 수도 없으며 이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태어날 자녀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가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 길에 들어서게 됐다. 어린 나이임에도 어른스러웠고 모욕을 참는 법을 알았으며 희생의 숭고함을 알았다. 하지만 어떨 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갈 위에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튈 때가 있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과거란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그 회색빛이 돌고 서글픈 그의 현실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미끼를 던졌다. 동민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비에 젖은 개처럼 과거가 주는 미끼를 물고 난동을 피울 때가 더러 있었다. 이로서 그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됐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하루를 버틸 수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효리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 길에 들서게 됐다. 효리를 이 음지로 들어서게 한 존재는 동민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역겹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 집안의 부부 말고도 그 부부의 아들이라는 놈이 독종중의 독종이었다. 그리고 유난히도 효리를 찾는 변태가 있었다.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고 건실한 기업의 회장인 중년의 남자였는데 별난 취향이 있어서 더러운 행색의 차림을 한 여성에 대한 패티쉬가 있었다. 독종은 효리에게 그 냄새나는 일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동민은 효리가 안타까워 어떻게든 거절하려 효리의 몸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이 독종이 눈치를 챘는지 효리를 미행했고 거짓이라는 사실 알게 되자 동민이 아직 포주일을 할 때 가게 사장에게 일러바쳤고 동민은 한 시간이 넘게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맞고 문을 나오면서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독종의 표정은 동민은 잊을 수가 없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독종은 멈출 수 없는 욕망을 아메리칸드림으로 확장시켰고 어떤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이 무작정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대접받겠다며 온 동네 방네에 자기 입으로 소문을 냈고 그렇게 그는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시간이 지나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내다 동민은 효리를 직접 픽업하러 효리네 집으로 향했다. 그 집 부부하고도 얼굴을 튼 사이였기 때문에 딱히 거부감 없이 집으로 곧장 향했다.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효리가 얹혀살고 있는 부부를 혐오했지만 이모와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들이 효리의 보호자 아닌 보호자였기에 싹싹하게 대해줬다. 효리의 집 앞에 도착하자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동민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숙이고 발자국소리를 최소한으로 하며 살며시 열려있는 대문 안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있었고 효리가 헤쳐진 머리를 묶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효리의 이모와 이모부였고 동민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자리를 피했다. 골목으로 들어선 동민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뛰는 가슴에 손을 대며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느꼈다. 안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곧바로 112를 눌렀다. 경찰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경찰은 자신의 소속을 밝히며 무슨 일이냐 재차 물었지만 동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효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초췌하고 죽고 싶어 안달을 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잘못 태어났다는 걸, 태어나면 안 됐다는 걸 기운으로 드러내는 효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란 전쟁 속이든 연예인이던 길거리 노숙자던 나이 든 백발의

노인이던 몸을 파는 여자건 간에 비참함을 숙이려 조소와 과장된 행동과 더욱더 얼굴에 분칠을 하는 존재라는 걸 동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효리는 예외었다. 마치 오늘 바로 장례식을 치러 장의사가 자신의 얼굴에 화장을 지우는데 수고를 덜게 배려하는 듯이 항상 푸석하고 병치레하는듯한 안색이었다. 동민은 그날 이후로 악몽에 시달렸다. 잠에서 효리가 묻고 있던 시신두구가 살아나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삽으로 찍는 꿈을 꾸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 효리가 죽이지 않았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다소 소설적인 전개를 꿈꿨으나 결국 자신의 눈으로 목도한 현실을 뇌리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이윽고 동민은 꾸역꾸역 살아가다 정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경찰서로 향하는 그를 뒤에서 덮쳐 말렸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는 큰 위로를 얻었다. 자신뿐 아니라 효리를 지키고자 하는 좋은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일말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래알만 한 행운은 지속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탕아가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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