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해야 알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밤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가로등이 비추는 길은 묘하게 따뜻해 보였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다가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아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뭐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갈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익숙한 포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이지, 뭐겠어."
"발렌타인 초콜릿?"
"응. 하루 늦었네. 근데 원래 여자들이 주는 날이라길래."
나는 순간 웃음이 났다. 화려한 포장도, 사랑이 담긴 편지도 없이, 너무도 무심하게 건넨 초콜릿. 하지만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나 주려고 일부러 산 거야?"
내 물음에 아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편의점 갔다가 눈에 띄길래. 그냥 자기 생각나서, 샀어. 좋아할 것 같아서."
별것 아닌 듯한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초콜릿을 바라보았다. 가나 초콜릿. 오래전, 우리가 연인이던 시절에도 이 초콜릿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땐 서로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이 마냥 설레고 특별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초콜릿을 넣어 무심히 건네주던 아내의 수줍은 얼굴, 그걸 받고 괜스레 장난스럽게 놀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고, 우리는 서로를 향한 설렘으로 그 겨울을 따뜻하게 견뎠다.
나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그때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바뀌지만, 익숙함 속에서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초콜릿 포장지를 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종이 포장의 감촉, 그리고 안에 담긴 네모난 초콜릿 조각들. 그저 달콤한 맛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의 기억과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부드럽게 녹아드는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거 아까워서 못 먹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아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보기만 해."
"그럴까?"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어떤 날, 어떤 순간이든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루 늦은 발렌타인 초콜릿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꼭 그날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고 싶은 순간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하루가 늦든, 한 달이 늦든, 중요한 건 마음이 닿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사랑은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순간에 전해지는 것이다. 하루 늦었더라도, 아니 더 늦더라도, 사랑은 언제나 따뜻하게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