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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날, 기적이고 희망의 날

6월 3일

by 서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언젠가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을, 오늘따라 곱씹게 된다. 누구를 선택하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가진 권리를 스스로 행사할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고 지나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내와 나는 확신에 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등을 함께 민다. 걸어가는 길 위로 어딘지 모르게 단단하고 결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오늘은… 좀 더 특별한 마음이야.”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랬다. 언제나 그랬던 투표일이었지만 오늘은, 이 순간만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둘 다 긴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길가에 피어오른 햇살, 투표소로 가는 길목에 선 나무들, 그 모든 것들이 오늘은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오랜 시간 숨죽여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자기야, 사람들 많아 보여도... 다 우리처럼 같은 마음이겠지?” 아내가 가볍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같은 마음이니까 이렇게 함께 걷고 있겠지.”


아내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무수한 감정들을 나는 안다. 기대와 긴장, 희망과 불안,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려는 작은 용기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그러나 확신에 찬 걸음으로.


투표소 앞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각자의 표정 속에 묵묵한 다짐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인 광경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했다. 어쩌면 그 눈빛 하나에 모든 말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작은 선택이 모여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지금의 이 결심이 훗날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순서가 되어 투표용지를 받아 들었다. 펜 끝을 누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묵묵히 이름 위에 도장을 찍었다. 한 장의 종이, 한 번의 도장이지만 그 위에 담긴 것은 우리의 삶과 내일이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투표소를 나오는 순간, 시원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작지만 확실한 책임의 무게.


아내와 나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길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처럼 투표소를 향해, 우리처럼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을 사람들.


“자기야, 오늘 이 순간, 기억할 것 같아. 우리가 함께 했던 권리행사의 날.”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순간을 기억하자. 거대한 역사 속에서 작은 점 하나 같은 우리가 그러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던 오늘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갔던 이 시간을.


한 줄 생각 :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 그것이 가장 작은 기적이고, 가장 큰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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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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