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묵은 족쇄, 역사 청산 없는 군 개혁은 없다

기억의 그림자

by 서담

바람이 스치는 늦여름의 저녁, 생각이 머문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땅,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제도와 문화, 의식과 가치가 과연 온전히 우리의 것일까. 한 세기를 훌쩍 넘어버린 시간 속에서도, 우리 곁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이름은 ‘일제잔재’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이며, 내일을 결정짓는 토대다. 그러나 그 뿌리가 오염되어 있다면, 아무리 푸르고 화려한 가지를 뻗어도 결국 언젠가 시들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 사회, 국방, 교육, 문화… 그 어떤 분야도 예외 없이, 일제의 잔재가 남긴 구조와 습성이 뿌리 깊게 스며 있다. 마치 오래된 건물의 기초 속에 녹슬어버린 철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에서는 서서히 부식이 번져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국방 분야의 그림자는 더욱 길고 깊다. 나라의 울타리를 세우는 군대, 그 핵심이 되는 장교단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일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적지 않다. 전·현직 고위 장성들 중 다수가 일제 육사를 전신으로 하는 ‘육사’ 출신이다. 이것이 단순한 학맥이나 출신학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가치와 문화, 사고방식과 제도가 여전히 일제의 군사철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군사체계는 식민지 백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팽창을 위해 피와 땀을 짜내는 도구였고, 지배를 정당화하는 질서였다. 그 정신이 온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해방 후에도 인맥과 제도로 이어져 온 것은 우리 스스로의 아픔이자 부끄러움이다. 자주국방을 외치면서도, 정신과 제도 속에는 여전히 타인의 그늘이 드리운 셈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정녕 일제잔재를 청산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청산할 의지가 없는 것일까. 방법이야 마음만 먹으면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국민적 합의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한 세대의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올곧은 뿌리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정치의 언어는 늘 외부를 의식하고, 경제는 의존의 사슬을 벗지 못하며, 교육은 주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문화는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의 시선을 좇을 것이며, 국방은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한 채 남의 그늘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국가의 정체성을 허물고, 내실 있는 성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된다.


청산은 단순히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 우리의 언어와 문화, 우리의 제도와 기술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느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만이,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기억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그림자를 그대로 둔 채, 햇빛을 더하려고만 한다면 언젠가 그 빛마저 흐려질 것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운 나라를 원한다면, 뿌리 깊은 잔재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우리의 뿌리를 심어야 한다. 역사란,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새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게 그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이 땅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사라지고, 온전한 빛이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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