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세상
아름다운 계절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즐거움 중에서도 ‘본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행복일지 모른다. 나 역시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벗으면 한 걸음 앞도 뚜렷이 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며칠 전, 출근길에 우연히 시각장애인 한 분을 마주했다. 그는 안내견과 함께 천천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선뜻 다가가 말을 걸진 못했다. 다만, 그들의 보폭을 따라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나는 사람도, 차도 많지 않은 시간대였지만, 그는 자주 멈춰 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용기 있는 발걸음인지 그때 처음 깊이 느꼈다.
길 위에는 노란색 점자유도블록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밟고 지나쳤을, 그러나 대체로 무심히 지나쳐버린 그 노란 선들. 그것이 바로 시각장애인의 ‘눈’이자 ‘지도’라는 사실을, 그날만큼은 마음 깊이 실감했다.
2022년 장애인통계연보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5.1%, 즉 264만 명이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중 시각장애인은 약 9.5%를 차지한다. 수치로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잠재적 위험이 된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2005년 제정)은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등을 ‘교통약자’로 정의하고 이들이 이동할 때 불편이 없도록 각종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점자블록, 장애인용 승강기, 음향신호기, 유도음성 안내 시스템 등은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삶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법의 문구보다 훨씬 거칠고 냉정했다.
나는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집 근처인 서초구 방배동(동덕여고)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뉴코아아울렛)까지 약 7km 구간을 도보로 걸으며, 점자블록의 연속성, 횡단보도의 음향신호, 에스컬레이터의 음성안내 여부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30여 개 구간 중 완전한 형태로 연결된 점자유도블록은 3분의 1 남짓. 나머지는 방향이 어긋나 있거나, 중간이 끊겨 있었다. 자전거와 킥보드, 심지어 자동차가 점자블록 위에 세워져 있는 곳도 다섯 곳 이상이었다. 음향신호기가 설치된 20여 개 횡단보도 중 정상 작동하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에스컬레이터 주의 안내를 음성으로 제공하는 곳은 아예 없었다.
비장애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풍경들이 시각장애인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도로 위의 작은 돌멩이 하나, 인도 가장자리에 세워진 안전봉 하나가 그들에게는 벽이자 절벽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 그 길을 걷는다. 한 손에는 흰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용기를 쥐고.
나는 그 용기 앞에서 숙연해졌다.
사회는 종종 ‘장애’라는 단어를 ‘특별한 존재’로 구분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우리가 걷는 같은 길 위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느리게 걸어갈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속도가 아니라, 그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이다.
이날 이후, 나는 장애인 인식개선 행사나 캠페인이 단순히 ‘하루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한 번의 자원봉사, 형식적인 체험으로는 결코 그들의 일상을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변화는 제도와 환경, 그리고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교통약자 배려’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할 미래다. 나이가 들고, 시력이 약해지고, 몸이 불편해질 때 그 길 위에서 다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의 관심과 개선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일이다.
오늘, 10월 15일은 ‘흰색 지팡이의 날’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흰색 지팡이는 단순한 보조도구가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다. 그 흰색 지팡이는 길을 짚는 도구이자, 세상과의 연결선이며, 그들의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 빛이 안전하게 흔들릴 수 있도록 길을 정비하고, 제도를 다듬고, 마음의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나도, 우리 모두도 그들의 길 위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진짜 ‘함께 걷는 세상’의 시작일 것이다.
“진짜 시선은 눈이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