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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Jun 06. 2024

일 년을 보낸 오늘

어제 저녁약속을 마치고 집에 오니 문 앞에 택배가 있었다. 열어보니 엘르데코 6월호였다.

두 달 전, 우리 집을 싣고 싶다고 에디터님이 연락을 주셨고 그렇게 촬영과 짧은 인터뷰를 했었다.

 

정확히 작년 6월 6일, 나는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네 번의 계절을 보내고

다시 맞은 6월 6일이다.


고립을 자처하는 마음으로 온 이곳이었다.


늘 쉽고 편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은 늘 나를 종속적으로 만들었다.

괜히 수고하여 나의 것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누군가가 수고하여 만든 것에 쉽게 올라타는 것이 영리한 방법이라 평생을 믿고 살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눈과 관심은 그 와중에 더 올라타기 쉬운 곳으로만 향했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타 결과를 얻고 나면 이상하게도 영혼이 메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를 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가진 어른을 만나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누군가는 변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그렇게 만들어진 변화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을.

그렇게 변화를 야기하는 사람을 '자유롭다''주체적이다''독립적이다'라고 표현하고,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속적이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나는 평생을 가짜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어른에게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주체적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독립적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고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라고 하셨다.

고독을 친구로 둬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판교에 자리를 잡았다. 덩그러니.


최대한 창을 많이 내어 해가 주는 빛과 자연의 변화를 최대한 받아내고자 했다.

집은 벽과 바닥, 천장을 모두 한 톤으로 맞추고 최소한의 가구만을 두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최대한 집으로 부르지 않으려 했다.

반대로 서울에서의 부름에도 꾹꾹 참고 집을 지켰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날도 있었다.

멍 때리다 하루를 그냥 보낸 날도 있었다.

책만 보다 지쳐 잠든 날도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얼마나 내가 바랬던 삶에 가까워졌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얼마나 내가 진짜로 살게 되었는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며

벅차게 기쁜 것들이

있었다.


앙상했던 잎들이 다시 초록으로 가득 차는 정원으로 위로받는 날들이 있어 기뻤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계절과 날씨가 다름을 감각할 수 있어 기뻤고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온 자연이 그린 그림자들을 감상할 수 있어 기뻤고

창을 열면 코끝을 찡하게 찌르는 잔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기뻤고

난로 속 타들어가는 장작을 하염없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어 기뻤고

천장을 유리로 두어 파아란 하늘 아래서 샤워할 수 있어 기뻤고

한밤중에 내린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내어볼 수 있어 기뻤고

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들에 잠들 수 있어 기뻤다


그 기쁨들 덕분에 혼자인 게 어색하고 어려웠던 나도

이제는 조금씩 그것에 익숙해졌다

다음 일 년은 또 그다음 일 년은

더 익숙해지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짜로 살아볼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 더 생긴

일 년을 보낸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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