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사유를 생산하는 공간
12월 14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첫 시행착오로 3개월 가까이 시간을 잃었다. 다시 시작하면 어떤 팀이 붙어도 기본적으로 설계에 2달, 시공에 2달이 필요하니 5월 초에나 입주할 수 있었다. 바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지내고 있었던 아파트 만기가 3월 말에 끝나 이사를 나와야 하니,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인테리어를 할 새로운 팀을 구하는 것도, 지금 지내는 집에서 이사를 나와 붕 뜬 한 달은 어디서 지내야 할지 등 내가 타협하지 않았기에 생겨난 문젯거리들이 나타났다. 물론 각오했던 일이기에 문제들을 펼쳐놓고, 또렷이 보고 해결하기로 했다.
먼저 팀이 필요했다.
'수준이 높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추상적이지만 확고하게 갖고 싶었던 방향이 있었기에 이를 이해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팀이 필요했다. 새로운 팀들을 서치하고 미팅하며 맞추어나갈 여유는 없었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주거비용이 두 배가 되면서 부담해야 하는 비용들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21년에 나와 섬세이 테라리움을 기획-시공했던 논스페이스 대표님께 미팅을 청했다.
수영장이 있는 파티하우스에서 고독한 집이 된 과정과 그 사이 교수님을 만나 얻은 깨달음을 전했다. 나는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는 집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표님은 본인도 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미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어떠한 집을 설계하고 만든다 하더라도 몇 개월만 지나면 나는 그곳에서 아쉬움을 보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은 어제보다 나아진 나로 살아보겠다는 말이었고, 그렇다면 수준이 높아진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낸 무엇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고,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대표님께, 차라리 너무나도 치열하게 작업해서 지나고 난 후에 그때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이 당시의 최선이었음이 묻어져 기록된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현장을 맡을 팀장도 그만큼 치열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공사 일정으로 인해 내가 이사를 나와야 하는 일정이 이미 빗나갔기에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 처음에는 이삿짐을 창고에 박아두고 두 달은 호텔에서라도 지낼 각오였다. 여러 계산을 해보니 그것보다는 현재 지내고 있는 집주인과 협상을 해내서 두 달을 더 지내다가 이사하는 것이 가장 깔끔했다. 지내던 아파트는 반전세로 일부 보증금과 월세를 120만 원 정도 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시기가 집값이 다시 하락장에 들어선 상태라 집주인들이 전세든 월세든 세입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집주인에게 연락을 드리고 두 달 정도 더 지내고 싶다고 했다. 어렵다고 하시면 기존 계약대로 3월 말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세입자가 없는 상황이면 집주인이 나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운 상황일 것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말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월세 120만 원도 그 두 달 동안은 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조건을 받지 않으시면 그냥 제 날짜에 이사하겠다고 했다. (속으로는 제발!!!!!!! 그냥 있어달라고 해주세요!!!! 를 수십 번 외치면서..) 내가 보았던 상황들이 모두 맞았는지 다행히도 집주인 분은 월세 없이 두 달을 더 지내라고 하셨다.
이제 5월 말까지는 현재 지내는 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설계와 시공 일정만 맞추어내면 됐다. 사실 그것보다 내가 갖고 싶었던, '수준이 높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여전히 가장 중요했다. 다시 정리한 내용을 대표님께 보내드렸다.
논스페이스도 타이트하게 설계를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첫 설계 제안서를 23년 1월 16일에 받을 수 있었다. 집의 철학도, 집의 구조도 고민한 흔적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과감했던 건, 2층의 바닥 절반을 들어내 1층에서 층고를 높이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면서 벽이었던 동쪽의 면들을 모두 창으로 뚫어 채광을 모두 안으로 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인테리어에서 리모델링 수준으로 넘어가는 기점이었다. 비용도 기간도 크게 늘어나는 결정이었기에 고민이 되었지만, 내가 원했던 고독의 집이 되는데 중요한 요소라 생각했고 또 겁먹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자고 했다.
큰 그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협의가 되었고 그때부터는 결정과 결정과 결정의 나날들이었다.
벽면은 무슨 색으로 할지, 블라인드는 전동인지 수동인지, 바닥은 원목인지 마이크로시멘트인지, 수전은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수납공간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나의 하루 동선은 어떻게 되는지, 내가 가져올 가구는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지... 매일매일 수 십 번의 카톡과 전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결정도 대충 미루지 않았고 끝까지 집요하게 내가 직접 보고 직접 생각하고 직접 결정했다. 이렇게까지 할 각오가 없었다면 집은 이맘때쯤 이미 완성됐었을 거다. 철학이 부족한 채 만들어진 집에서 어제와 같은 나에 머무르며 지내고 있었을 거다. 나는 이 정도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 백가지를 결정하고 나서야 견적이 완성됐고 철거일정이 정해졌다. 3월 20일이었다.
세부적인 것들까지 모든 걸 결정해야 하는 설계가 끝나면 철거를 시작으로 이제는 모든 것이 수월할 줄 알았다. 아주아주 천만의 말씀이었다.
논스페이스에서 천장, 벽, 바닥을 포함한 전체 공간의 톤을 맞추겠다는 제안과는 달리 나는 바닥은 원목 마루를 원했다. 맨발로 다닐 때 원목이 주는 그 감각을 집에서 느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원목 마루는 표면이 너무 거칠어서 보통 가정집은 잘 선택하지 않는다고 마루업체가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만져보고 밟아본 마루 샘플이 실제 주문하여 들어오면 샘플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통상적인 설명과 함께. (이 통상적인 설명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천장과 벽에 마이크로시멘트 시공이 끝나고 일층과 이층 전체 바닥에 원목마루를 깔기로 한 다음 날이었다. 현장을 담당한 팀장님은 나에게 와서 쫙 깔린 마루를 직접 보러 오라고 했다.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그 마루가 아니라는 걸. 바로 허리를 숙여 마루를 손으로 더듬어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요구했던 그 원목의 샘플과는 거칠기가 확연히 달랐다. 원목의 색과 무늬는 같았지만 거칠기가 달랐다. 팀장님은 이 정도면 전체적인 무드에서 깨지지 않는 수준이라 판단하고 어제 마루를 깔았다고 했다. 바닥에 깔린 원목의 자재값만 이천만 원이었다. 중간에서 난처해하며 대표님에게 다급히 전화하는 팀장님의 표정이 보였다. 고민이 됐다. 너무 유난스러운 걸까. 오분정도 가만히 멈춰 생각했다.
통화를 마치고 들어오는 팀장님에게 말했다. 나는 이 마루로는 진행할 수 없다고. 다시 모두 원상복구를 하고 내가 원했던 원목마루든 아니면 처음에 제안 주셨던 방식으로 통일을 하든 하겠다고 했다. 대신 나는 이 실수에 대한 일체의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고 했다. 대표님께도 그렇게 전했고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여 알려달라고 했다. 난 이들이 감정에 호소를 하든 이 정도면 그래도 비슷한 게 아니냐고 우기더라도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현장으로 다시 오라고 해서 갔다.
목수들이 바로 어제 깔았던 그 마루를 모두 까내고 있었다. 논스페이스 대표님과 팀장님은 마루를 원상복구 하는 것도, 그 비용도 모두 본인들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비겁하게 이 정도면 비슷하지 않냐고 둘러댈 수도 있었을 거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을 요청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한 나의 신념에 대한 지지이자, 본인 역시 높은 수준의 인간으로 살아보겠다는 각오처럼 느껴졌다.
대충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원했던 대로 치열했다.
차라리 여러 색을 활용해서 내부를 구성했다면 이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을 것들이 눈에 계속 걸렸다.
오히려 복잡한 집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것들이 단순한 구조이다 보니 더 눈에 밟혔다.
더하고 더하는 것이 아닌, 덜어내고 덜어내는 작업들을 계속해서 해야 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해 5개월을 아침점심저녁주중주말 없이 뭐가 궁금하면 떠오르면 아쉬우면 박지훈 팀장님에게 연락했다. 클라이언트인 나의 집요한 요구들은 모두 나이스하게 대응하고 처리하는 동시에 거친 현장의 인부들에게는 일정과 디테일을 챙기기 위해 터프하게 리드했다. 현장에 가면 늘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팀장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거의 막바지였던 5월 말쯤에는 나도, 현장을 챙겨 온 팀장님도 힘듦과 스트레스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목 끝까지 차오른 지금부터 더 갈 수 있어야 그것이 진짜라며 서로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예정했던 5월 말에 공사를 마무리했고 6월 6일 나는 이사했다.
이사한 집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3주 정도 지나고 나니 정식으로 저녁식사와 함께 누군가를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가족도 친한 친구도 아닌 인테리어를 담당한 팀장님이었다. 논스페이스 대표님도 함께 초대를 했지만 저녁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이 자리는 박지훈 팀장님이 보여준 일에 대한 진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리고 끝까지 치열하게 함께 뛰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 역시 식사 내내 전했다.
나는 평생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유의 결과들을 수입해서 사는 습관이 배어버린 사람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늘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뱉어낸 그것들을 주워 먹으며 스스로 종속되어 살아왔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 사유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게으르고 부족한 나는 살던 모습 그대로는 그것들을 해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가장 화려한 성수동의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 판교에 나를 도울 공간을 스스로 지었다.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