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할 소명'을 위한 징표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게 몇 살 때쯤이었는지. 내 앞니가 남들보다 튀어나왔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렸던 때가.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그때쯤 아니었을까. 나를 '토끼이빨'이라고 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그 나이 때쯤으로 떠오르는 걸 보니. 하지만 앞니가 튀어나온 건 내게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보다는 엄마가 앞니에 대해 마음이 쓰였는지 내게 교정을 권유하셨다. 당시에는 교정을 하면 영락없이 철길을 쭉 깔고 2-3년은 지내야 했다. 오히려 튀어나온 앞니를 더 부각시켜주는 그 철길을 차마 허락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엄마가 한번 더 물어보셨다. 남고를 다녔던 나는 학원을 다니며 이성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커질 시기였다. 그 시절 했어야 대학을 가서 보다 나은 상황에서 여자친구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선구안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군대에 가서도 엄마의 제안은 멈추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연애도 나쁘지 않게 해내며 지내던 나는 사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그냥 지내겠다고 했다. 늘 나에게는 교정을 마친 2-3년 뒤보다는 바로 지금이 더 중요했던 이유였지 않았을까.
제대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와 사업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국으로 들어온 아들에게 엄마는 교정을 또 한 번 물으셨다. 이번엔 나름 당차게 인생을 걸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교정한 이를 보이며 첫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그렇게 교정은 내 인생에서 영영 떠난 것으로 알고 살았다.
그랬던 내가 올해 교정을 시작했다. 2023년 2월 16일에 장치를 처음 달았고 이제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많이 알아보고 어떨지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귀찮고 짜증 나고 아픈 일들이 많았다.
생니 발치를 4개 했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펜치 같은 걸로 잡고 흔들어 뽑으시더라. 마취는 했지만 눈앞에서 이가 뽑히는 경험은 예상했던 그것 이상이었다.
뭘 먹다가 철사가 끊어져 잇몸과 혀에서 피가 나는 것도 처음에는 어쩔 줄 몰랐지만, 이제는 빠져나온 철사를 직접 집어넣거나 잘라서 정리를 하기도 한다.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가면 워터픽과 치실을 챙기는 게 일상이 됐다.
교정을 하니 발음이 무너져 말을 할 때면 더 신경 써서 힘을 주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이전보다 누군가와 대화하는데 쓰이는 에너지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심지어는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때도 특정 발음이 되지 않아 가끔은 슬프기도 하다.
이토록 교정은 내 생각보다 훨씬 험난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평생을 걸친 엄마의 꾸준한 권유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교정을 나는 왜 이제 와서 결심했는가.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2022년 10월 말부터 나는 함평의 기본학교를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 했다.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가장 중요시하는 교육은 현장에서 이뤄지는 교수님의 강의 시간도, 다음 날 새벽에 일출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는 고산봉 등정도 아닌, 집에서부터 함평까지 오고 가는 왕복 8시간 정도의 '오롯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그 시간 동안에 네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나에게 던지고 답하라고 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우리는 매 수업시간 시작 전에 '기본학교 선언문'을 함께 낭독하며 그 네 가지 질문을 새겼고, 에세이 과제로 그 네 가지 질문을 써서 제출했다. 네 가지 질문에 모두 답을 하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질문부터 다시 에세이를 썼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내가 살아왔던 나의 인생을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보면 다섯 번째 질문 '내가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할 소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라고 하셨다.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날 것이라고. 정확하게는 현현顯現 할 것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렇게 나는 충실히 따랐다. 10월 말부터 두 달 정도를 함평을 오가는 8시간과 에세이를 쓰는 과정에 그 네 가지 질문에 치열하게 답해보려 애썼다. 기본학교를 오기 전 2년 반 이상을 나를 탐구하는데 발버둥 쳤던 시간들이 나를 많이 도왔다. 이미 찾았던 내 삶의 키워드들과 아직 잇지 못했지만 새롭게 찾은 점들을 연결하고 또 연결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22년의 마지막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그것이 말씀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가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드러나버린 그것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던 소명이었다. 낯선 그 소명이 왜 드러났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전에 내가 찾았던 내 삶의 키워드인 '쇼맨' '무대' '영향력' 등에 모두 연결되는 소명이었다. 게다가 낯섦을 넘어서 황당하게까지 느껴진 그 소명에 나는 설레었다. 그 소명을 이뤄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 소명 자체를 이 글에서 밝힐 수는 없지만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만큼 무언가를 대표하고 책임지는 자리의 소명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무언가를 대표하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게 되었고, 평생 신경도 쓰지 않았던 치아가 가지런하지 않음이 신경이 쓰였다. 그 소명을 온전히 완수할 미래의 나를 위해 2-3년의 당장의 시간을 충분히 내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마음이 기꺼이 든 것은.
물론 교정이 그 소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 전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소명을 내가 살아가는 이유로 내가 정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들이 많이 변했고 교정은 그중 작은 일부였다. 그 많은 변화 중에 교정은 내가 소명을 찾았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와 같이 두고 싶었다. 내 신체의 일부에 두어, 매일매일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기로 정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이유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매일 이를 닦을 때도, 밥을 먹다 불편함을 느낄 때도, 말을 하다 발음이 새어 나갈 때도 나는 왜 내가 교정을 했는지를 떠올리고 있다. 마치 링 위에 올라서는 격투기 선수가 마우스피스를 끼며 마음을 다지는 것과 같이, 나도 교정기 덕분에 매일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
드러난 나의 소명에 대한 반가움과 두려움을 들고 교수님께 티타임을 부탁드렸다. 그렇게 23년 1월 10일, 역삼역 GFC에 있는 카페에서 교수님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나는 누구인지를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교수님께 설명드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버린 내가 죽기 전까지 완수하고 싶은 소명을 말씀드렸다.
천천히 설명을 들으시던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본인이 최근에 만난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드러난 소명은 창혁이 너의 것이 맞을 거라고.
반대로 교수님도 교수님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래서 죽기 전까지 완수하고 싶은 소명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셨다. 교수님의 소명도 나의 소명도 완수하기 위해 겪어야 할 시련과 어려움들이 눈에 훤히 보였다. 우리는 그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를 했고, 자유와 주체적인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즐거운 대화였다고 말씀하시며 교수님은 다음 일정을 위한 채비를 하셨다. 준비가 다 되셨는지 일어나시면서, 올곧게 자세를 고치고 눈을 정확히 맞추고 악수를 청하며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폼나게 살자"
그렇게 나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그 징표를 새기고자, 나는 치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