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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Jan 12. 2021

발라만 보시고 가세요

2011년 여름 - 2013년



시카고에서 만난 미국 국적의 파트너는 투자금도 없는 26살의 나에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제안을 했던 것 같다. 이미 그들이 한국에 수입한 스포츠 크림 재고들이 있었고, 누군가 한국에 자리 잡고 오퍼레이션을 해줄 수 있다면 그게 경험도 경력도 없는 막 대학을 졸업한 사람인들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한국 총판을 가진 한국 법인, 플렉스파워코리아의 대표를 맡고, 매출을 만들어 내는 것에 맞춰 현재 파트너들의 지분을 받는 것으로 계약을 약속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2011년 8월이었다. 그들이 얘기한 장소에 가보니 스포츠 크림 재고들이 쌓여있었다. 대략 천 개 이상 되어 보였다. 크림 하나를 집어 들고 뒤쪽에 유통기한을 보는 순간 나는 멍했는데, 유통기한이 몇 달 남지 않은 제품들이었다. 보통 화장품과 같은 크림류 제품은 생산하면서 2년의 유통기한을 가지게 되고, 6개월 이내로 남은 제품들은 사실상 상품성이 없다. 한국에 재고가 있다는 것만 들었지,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고들이 있다는 얘기를 미리 듣지도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의 첫 사업은 그렇게 스타트가 된 것이었고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먼저,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업하는 마음을 먹었던 그 날 한강을 달리다 찾아갔던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함께 일해주기를 부탁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친구는 일 년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졸업도 하고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무엇보다 내가 마음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함께 해줄 수 있다는 것에 일 년이어도 좋다며 함께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결론적으로 난 이 친구에게 사업 첫 일 년을 보내며 가장 많은 의지를 했고 약속했듯이 일 년이 지난 후에 친구는 졸업 후 원했던 광고대행사에 취업까지 성공했다. 가장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시기에 긍정적이고 단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했던 파트너였다.


파트너 친구가 만들어 준 멋지고 웅장한.. 배너



친구가 합류하고 나는 영업을 친구는 마케팅을 맡았다. 사실 회사 계좌에 잔고 조차 없이 시작했다 보니 있는 재고들을 팔아서 매출이 나와야 그 돈으로 마케팅이 가능했다. 플렉스파워코리아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생활체육을 하는 타겟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체육 쪽에 연결되어 있는 업체와 대표님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돌리고 메일을 남겼다. 오전 오후에는 그렇게 연결된 업체나 대표님을 만나 뵙고, 4-5시가 되면 사무실에 돌아와 홈페이지를 확인해서 들어온 주문량 (하루에 한-두 개)을 테이핑 해서 근처 편의점 택배를 통해 붙였다. 운동 전에 바르는 크림이라는 컨셉은 신선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모두 재밌는 아이템이라 생각했지만 구매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린 나이로 회사의 신뢰가 떨어질까 명함은 팀장으로 파고, 들어오는 CS 콜도 CS 직원인 것처럼 받았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대표님께 확인해보겠다고 고객님께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해결할지 파트너인 친구와 고민했다. 그렇게 시간이 몇 개월이 지났지만 매출도 반응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수막이 합성같지만 실제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그러다 우리는 계속해서 니즈가 있을 업체와 소비자를 찾아가기보다 그런 타겟들이 모여있는 박람회에 나가보자는 방향을 잡았다. 사실 제품을 판매한 매출로 마케팅이나 다른 투자가 가능했던 우리에게 박람회 참여를 위해 선투자를 하는 결심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가장 기본단위의 부스를 확보하는 데에도 투자비용이 4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4일 사용하는 비용이었다. 그 부스에 누군가 와서 우리 제품을 알아주고 거래가 생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부스에서 직접 판매도 함께 운영하기로 했다. 그렇게 참여한 박람회는 참 현실적이었다. 돈을 써서 휘황찬란한 다른 브랜드들의 부스들 속에서 뼈대만 앙상한 기본 부스 안의 나는 더 위축됐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르면 뜨거워지는 크림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발라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파트너 친구와 우리 부스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발라만 보시고 가세요"를 외치며 하루 종일, 4일 부스를 지켰다. 첫 박람회가 끝나고 아픈 허리와 다리, 크림을 너무 발라서 퉁퉁해진 손으로 부스를 정리했다. 얼마나 매출을 냈을까 하고 확인해보니 들였던 400만 원보다 아주 조금 더 남았었다. 사무실로 집기들을 모두 들고 와서 파트너와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모든 박람회를 리스트업 했다. 우리 회사 수준에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판매와 홍보가 동시에 가능한 박람회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사람만 있다면 어디든 간다...


어느새 우리는 골프박람회, 등산박람회, 스포츠 박람회뿐만 아니라 건축박람회, 자재박람회 등 사람이 많이 몰리기만 한다면 카테고리와 상관없이 부스를 확보하고 참여했다. 방식은 같았다. 계속해서 "발라만 보시고 가세요" 전략이었다. 그러던 하루는 우리 둘로는 힘에 부쳐서 함께 크림을 발라줄 멤버를 찾다가 친구와 나의 여자 후배들에게 부탁을 했다. 이제는 셋이 나란히 서서 발라만 보시고 가세요 전략을 펼치는데 이상하게 나와 내 친구 앞에는 아무도 오질 않고 여자 후배에게만 사람들이 몰려서 제품을 체험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매출도 우리 둘이 하루 종일 바르고 설명할 때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그다음 참여한 박람회부터 우리 부스에는 더 많은 여자 멤버들이 함께했고, 한 달에 2회 이상 꾸준히 박람회에 참여하며 매출과 거래처가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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