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상반기
새로 시작한 소형가전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런칭한 2019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공허함을 느꼈던 일 년이었다. 그랬던 이유를 짧게 요약하자면,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던 사람이 그 목적을 이뤄낸 후에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젖어서였다. 목표가 경제적 독립이라는 것부터가 사실 잘못 설정되었던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운동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들을 해왔었다.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나름대로의 진화를 계속해서 진행했었지만 경제적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 모든 행위들을 멈췄었다. 인생 처음으로 진화를 멈췄던 때가 2019년이었고 그랬기에 나는 이유모를 공허함을 계속해서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2020년 초부터 개인적으로는 '진화'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뭐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봤고, 스노우보드를 배우고, 요가 필라테스도 해보며 내가 익숙하지 않은 일들에 계속해서 도전했다. 매일매일의 진화가 다시금 나를 즐겁게 만들었고 그 에너지는 내가 하고 있던 일들로 다시 돌아왔다.
오트루베 에어샤워는 날씨가 따뜻해져 감에 따라 계속해서 좋은 매출을 내고 있었고, 모회사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적에 만족해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새로 런칭한 바디드라이어 브랜드를 열심히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본 시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으나 나를 믿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구성원들을 위한 이유도 컸다. 개인적으로는 돼지코팩을 마케팅하고 또 그 브랜드를 매각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사람은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 그리고 벌써 2번이나 매각을 경험한 사람으로 외부에 알려져 있었다. 늘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았다, 마케팅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다른 누군가보다 압도적인 마케팅 전문가이냐, 매각 전문가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팩토리를 매각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나라는 사람을 브랜딩 하는 데 있어서 '입봉작'이라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나라는 사람이 돼지코팩을 마케팅 하기 이전과 이후의 기점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냐 하면 그렇지 않다. 나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기 이전과 이후의 기점에 있어서 매각 전문가가 되었냐는 물음에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에게 돼지코팩 이라는 입봉작이 생긴 이후로 나는 더 좋은 사람들과 일할 기회가 생겼고, 자금과 정보라는 더 풍부한 자원들 안에서 앞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감독에게, 예능 PD에게 입봉작이 필요하듯 우리에게도 각자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누구나 인정하는 입봉작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부에선 내가 연봉이 얼마인지, 매각을 해서 얼마를 벌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미팩토리를 창업하고 매각까지 진행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다. 이 혜택을 나만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하는 지금 이 멤버들도 함께 만들고 있는 이 브랜드를 열에 일곱 여덟은 사용해보진 않았어도 알고 있는 브랜드로 만들어 그들의 입봉작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함께하는 멤버들도 이 브랜드의 BM으로, 디자이너로, 상품개발자로, 영업맨으로 각자의 입봉작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들이 이직을 하든, 새로운 사업과 함께 새 출발을 하든 훨씬 좋은 조건 안에서, 그리고 높은 성공 확률 안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함께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우리의 입봉작을 만들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런 마음으로 진행하는 와중에 오트루베 에어샤워는 5월 가정의 달 프로모션을 맞아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재고를 완판했다. 더 판매할 수 있었으나 자금이 부족하여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그래서 모회사에서 기존에 운용자금으로 대여해준 10억은 개발비, 금형 생산, 제품 발주 비용으로 모두 사용해서 부족하니 추가적인 투자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실 이유도 납득이 갔다. 모회사는 화장품 회사였고 사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소형가전 브랜드를 제외한 모회사의 모든 브랜드는 뷰티 코스메틱 브랜드들이었다. 그런 회사에서 소형가전에 추가 투자를 하기 어렵다는 상황은 이해되었으나, 내가 만든 시장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도 실망스러웠고 동시에 함께하는 멤버들에게 입봉작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나의 약속도 져버릴 수 없었다. 모회사에서는 지금 정도로 매출을 내면서 적당히 운영하기를 바랬다.
나는 내가 본 시장을 모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고 동시에 멤버들을 위한 인생 입봉작이 될 만한 브랜드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나도 포기해야 할 것을 내놓아야 했다. 고민 끝에 나는 매각을 하면서 얻었던 내 자산 중 적지 않은 부분인 20억을 다시 그 브랜드가 소속된 비상장법인에 유상 증자하기로 했다. 모회사는, 매각하여 얻은 자산을 다시 비상장법인에 투자하겠다는 나의 제안은 재매각이 되지 않으면 모두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누가 봐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나의 제안은 오랜 협의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모회사는 잃을 것이 없는 제안이었고 나는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빠른 진행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딜이 끝나고 듣게 되었지만 내가 이 딜을 통해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브랜드를 키워내 모회사가 아닌 제3자 회사에 브랜드를 매각하겠다고 했고, 이를 통해 모회사도 다시금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제부턴 나만 잘 해낸다면 모두가 행복한 구조였다.
나의 제안은 순수했다. 내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자신이 있었고 함께하는 멤버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딜이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소유진 님으로 광고모델을 선정하고 지하철, 버스에도 광고를 시작했다. 그렇게 정말 나만 잘하면 되는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