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혁이창 Feb 13. 2023

특별해야만 사는 사람

내가 끊임없이 건너갈 수 있는 힘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다. 그 어렸을 적부터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곳을 보고 있는 무대 아래가 아닌,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무대에 서는 소수의 편이 좋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에서 엄마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며, 늘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먼 시기인 초등학교 1학년 때, 누구나 집에서 사랑받으며 지내온 수 십 명의 친구들 가운데서, 집이 아닌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무조건 적인 것이 아님을 눈치챘던 것 같다. 내가 특별한 사람으로 사는 건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님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나를 특별하게 여겨주실 때 내가 느꼈던 그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나를 가득 채웠었기에,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누가 관심을 받고 어떻게 사랑을 받고 왜 특별한 지를 관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운동 신경이 있었고, 공부를 하면 성적이 상위권에는 들었다. 농담하는 걸 좋아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친구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계급이 생기고 있음이 보였다. 덩치가 더 크거나 싸움을 잘하는 남자애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생겼다. 나에게 사전에 협의도 없이 자기들끼리 무대를 나눴다. 그들은 특별했고 난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중학생이 되자 더 심해졌다. 심지어 내가 마음에 품은 여자친구는 대부분 그 세력들과 가까이 지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싸움을 하러 다니고 담배를 피우는 그 세력에 끼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대를 양보할 마음은 없었기에, 그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면 한 번도 물러섬 없이 주먹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만든 무대에는 내가 서고 싶지도, 설 수도 없었기에 나는 학급 회장을 도맡아 하며 다른 무대를 만들어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단 일 년도 쉬지 않고 학급 회장을 맡았다.


고등학생이 되니, 주먹으로 만들어 낸 무대에 섰던 친구들 중 절반은 공업계나 상업계인 특성화고를 갔지만 나머지 절반은 일반계로 넘어와 그들마저 하지 않던 공부를 시작했다. 무대에 서는 자격의 지각변동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섰다. 물론, 좋은 대학보다는 그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을 때의 나의 특별함을 쟁취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공부는 정말 재미없었고 생각해 보면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난 사랑받아야 했고 특별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내 목표에 비해 초라한 대학에 합격했고, 대학이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하신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재수再修는 없다며 한국외대를 그냥 다니라 하셨다.


외대라는 타이틀은 무대에 서기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안에서 내가 특별해질 수 있는 무대를 세팅했다. 당시에는 4개 대학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국외대)만 있었던 동아리인 조정부에 가입했다. 배를 타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우리나라에 4개 대학만 가진 동아리는 특별했고 나는 내가 만든 그 작은 무대를 딛고 올라섰다. 만나는 사람들은 조정이 뭐냐고 물어보기 일쑤였고 나는 왠지 모를 으스대는 마음을 겨우 감추며 설명해주곤 했다. 조정부에서도 나는 중심이 되었고 2학년이 되면 주장이 되어 조정부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데 내 한 몸을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맨날 술이나 마시고 배 타고 다니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미래를 위해 1학년을 마치자마자 입대를 권유하셨다. 생긴 것과 다르게 효자인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군대를 가는 것까진 좋으나 육군은 원치 않았다. 누구나 갈 수 있는 육군이 그냥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군보다 1개월이 짧은 해군을 택했다. 바다가 좋아서도 해군 정복이 멋져서도 아니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몇몇 키가 큰 동기들을 나와 함께 차출해 가며 헌병에 지원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해군 헌병은 각 부대에서도 몇 명 안 되는 특별한 보직이었다. 헌병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해역방어사령부로 배치받았고, 나는 훈련소에서 배치받은 부대로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헌병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대부분의 군대에선 폭행이 사라지고 있던 시기였지만, 군기가 강했던 해군 헌병에서는 한창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표정으로 구타하고 또 맞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가진 옵션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께 알리거나 적응하거나. 효자인 나는 구타 사실을 알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느니 적응해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맞으며 버텨낸 1년 후에 상병이 되니 나에게도 권력이 생겼고 나는 구타 및 가혹행위를 모두 멈추게 했다. 그렇게 남은 1년은 부대 정문을 밤새 지키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곧 제대였고 나의 무대는 무사한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다시 외대생으로 복귀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미국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다 말씀드렸다. 조정부 주장으로 서기에는 무대가 작았다. 이미 공부로 좋은 대학을 쟁취하는데 실패하여 무대가 좁아짐이 느껴지니 조급해졌다. 제대하고 5일 뒤 바로 미국으로 갈 준비를 마치고, 외대 앞 노천 술집에서 조정부 선배들과 동기들을 모아놓고 주장을 맡지 못하고 떠나 죄송하다며 만취한 채 엉엉 울었다.


미시간주립대로 편입했고 경영대학 중 가장 학점이 높아야 지원이 가능했던 회계학과를 가기 위해 몰입했다. 미국에서 취업하기에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아시아인들의 현지 취업 확률이 가장 높은 전공이었다. 실제 회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공을 택했다. 그래도 미국 대학을 나와 현지에 취업한 회계사 정도는 되어야 특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만나 본 현지 취업에 성공한, 나에겐 특별했어야만 했던 한인 회계사 선배들의 모습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바쁜 시즌에는 하루에 2-3시간 정도로 잠을 줄여가며 일하지만, 현지에 취업해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는 그들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나와 같은 입장의 후배들은 그들의 영웅담에 눈빛이 반짝였지만 나의 마음은 돌아섰다. 내가 아는 세상에선 가장 특별할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는데, 그 삶을 살고 있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대 아래에서 박수 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는 길처럼 보였다.


모두가 누가 정해주는 일을 한다면, 내가 정한 일을 하는 것이 특별할 것이라 봤다. 모두가 그 틀 안에 들어가서 누가 더 좋은 회사에 다니는지, 누가 더 높은 연봉을 받는지 순위를 정하는, 그 키재기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 경쟁을 이겨내 봤자 무대에 설 기회가 나에겐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나의 것을 하고 싶어졌다.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라리 그것이 더 특별하다고 믿었다.


스물 다섯, 모두가 말렸던 창업으로 나는 건너갔다. 특별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나를 늘 건너가게 만들었다. 건너갔던 나는 승패와 관계없이 늘 성장했다. 머무르지 않고 건너가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진화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년불비불명 三年不飛不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