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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Apr 13. 2023

수준水準이 높은 사람

무대에 서기 위한 다음 조건

특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무대 위에 서기 위해 나는 달성해야 하는 과제들을 늘 열심히 수행해 왔다. 초등학생 때는 싸움을, 고등학생 때는 공부를, 대학 때는 돈 벌 궁리를, 졸업하자마자는 창업하여 돈을 벌었다. 뭐 하나 내가 좋아해서 기꺼이 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다만 특별하게 살고 싶었고, 무대 아래가 아닌 위에 서고 싶었을 뿐이었다. 특별하다는 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나 원하지만 소수만 가질 수 있는 그 과제를 잘 해내야 했다. 그 과제들이 싸움이었고, 수능 성적이었고, 대학이었고, 연봉이었고, 돈이었다. 지나고 보니 꽤나 악착같이 했었고 운이 좋게도 서른을 막 넘기던 즈음에 나는 또래보다 돈을 많이 버는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나는 소수가 되었고 특별해졌고 무대 위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고,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세상은 이런 소수를 영앤리치 라고 불렀다. 세상엔 영young 도 많고 리치rich 도 많지만, 두 조건을 충족한 영앤리치는 소수이기에 너무나도 특별하여 그렇게 합의하여 부르기로 한 용어까지 생긴 것일 테다. 그 특별함에. 그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다. 영영 그 무대 위에서 내려올 일이 없을 것처럼.


몇 년이 더 지나니, 영앤리치에서 자연스럽게 영young이 탈락했다. 정신이 조금 차려졌는지 주변을 살펴보니 리치rich가 내 주변에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돈이 있지만 무대 위에 서지 못한 사람들이 눈앞에 보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주변에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경제적 이득에 이끌린 사람들은 여전히 바글바글했다만)


불안함이 엄습했다. 돈 다음이 무엇인지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싸움과 성적과 대학과 돈처럼 세상이 이미 정해둔 기준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쟁취해 볼 텐데, 그 쟁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게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무대에서 끌려내려 오게 생긴 판이었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20년부터 나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탐구가 이 불안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하던 2021년 1월, 나는 어떤 철학자의 인터뷰 앞에서 멈췄다.

2020년부터 내가 매일매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보고 경험하고 있었던 모든 나의 행위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였다.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왜 나를 궁금해했던 것인지. 왜 나는 모든 것을 던지고 판교로 와 나를 고독하게 만들어야만 했는지. 내가 입 밖으로 단어들을 던져내 표현하지 못했던 걸 이 사람은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youtube를 통해 최진석 철학자의 강연들을 들어보기 시작했다. 책을 사서 그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또렷했다. 처음으로 '수준의 차이' 라는 것이 나를 압도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차라리 감동적이었다. 그런 그가 그의 고향 함평에서 학교를 열어 6개월 동안 가르침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2022년 11월, 나는 주저 없이 그 압도감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함평으로 향했다.


달랐다.

그냥 쓰는 단어가 하나 없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를 전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의 수준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닿아보지 않았던 곳에서부터 솟아 나온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사람 사이에 어떻게 수준의 차이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youtube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취향이 다른 것이지 수준의 차이가 아니지 않느냐고.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취향이 다른 것이지 수준의 차이가 아니지 않느냐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수준의 차이라고.

누구나 youtube 영상을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책을 읽을 수는 없다.

누구나 그 영상을 통해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 누구나 책을 통한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대중음악을 통해 눈물 흘려본 경험은 있으나, 누구나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눈물 흘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능의 감동은 누구나 소비할 수 있으나, 예술의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누구나 소비할 수 있으나,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것은 누구나 소비할 수 없다.

보다 수준이 높은 것을 통해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지적인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만져지는 것. 보이는 것. 구체적인 것에만 늘 반응하며 살았다. 내가 그의 인터뷰를 읽고, 그의 강연을 듣고, 그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그 수준의 차이라는 것의 실체가 그제서야 와닿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를,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수준을 나눈다는 것이 일단 감정적으로 불편했다. 그러다보니 보이는대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불편했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내가 보고 싶은대로 보고팠다. 심지어 그 좋은게 좋은거라는 잣대는 수준이 낮은 내 자신에게도 참 후했다. 이런 수준이 낮은 내 모습도 취향이니 괜찮다고. 현실을 똑바로 보니, 나는 그저 수준이 높지 않아 못생긴 내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믿으며 살아온 내 인생 전체를 부정해야 했기에, 보이는 대로 볼 자신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   


그가 답변을 마쳤고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보았다.

60살이 넘은 그는 정확히 무대 위에 있었다. 그는 현실에 서 있었다. 나를 포함해 16명의 20대, 30대 학생들이 4시간이 넘게 걸려야만 도착하는 이곳 함평에 모였다. 매주말마다 6개월을 빠지지 않고 출석해야만 하는 것을 알고도 기꺼이 에세이를 쓰고 면접을 본 후 모였다. 내가 바래온 그 무대를 가진 사람이었다. 배울 것이 있고 존경받는, 이 수준 높은 사람은 이 무대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기뻤다.

용기를 내어 수준이 낮은 나를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니 앞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였다.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길이 눈 앞에 놓였다.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해야할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절박한 마음을 먹었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라면 그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았듯,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도 쟁취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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