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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Mar 13. 2023

장르가 되어보겠다는 야망野望

2022년

2019년 하반기, 바디드라이어 단일 제품에 '오트루베' 라는 이름을 가지고 브랜드를 시작했다. 이전의 마케팅 방식 안에서 종목만 화장품에서 소형가전으로 바뀌었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첫 런칭한 'wadiz'에서 4억 가까이 매출이 나오면서, 적어도 누가 바디드라이어를 사겠느냐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2020년 5월, 보유한 재고를 모두 판매했지만 회사에 현금이 부족해 추가 재고를 미리 확보할 수 없었다. 추가 운영 자금을 모회사에 요청했지만 거절과 함께 적당히 운영하라는 답이 왔다. 시장에 없었던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그 정도의 성과로는 함께하는 멤버들의 '입봉작'을 만들어 줄 수 없었다. 엑싯하며 보유한 현금 중 20억을 개인적으로 유상증자했다. 소유진 님을 모델로 쓰면서 온라인 외에도 지하철, 버스 광고를 통해 바디드라이어를 시장에 알렸다.


2020년을 마무리할 때쯤 보니, 외형적 매출은 커졌지만 그만큼의 광고비의 부담을 따라왔다. 돼지코팩을 마케팅할 때와 같이 광고비 대비 매출을 계산하고 있었다. 광고비에 의존하지 않고 매출을 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지속가능한 매출을 만들어 낼 수 있냐는 물음에 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2021년 1월, 그렇게 지속가능한 브랜드가 되기 위해 리뉴얼을 시작했다. 순우리말에서 따온 섬세이 SUMSEI라는 네이밍과 한국의 자연을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휘발되는 온라인마케팅이 아닌 체험형 공간을 서울숲에 준비했다. 그렇게 8월, 섬세이 SUMSEI로 리뉴얼된 바디드라이어 와 섬세이 테라리움 SUMSEI terrarium을 오픈했다.


2022년은 일 년 내내 우리는 어떻게 지속가능한 브랜드가 될 수 있느냐 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실행으로 채워졌다. 19년부터 판매해 온 바디드라이어였기에 홈쇼핑과 인플루언서들에게 많은 판매 제안들이 들어왔지만, 그것들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생각하여 고사했다. 단기적인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가격 할인 등의 프로모션도 모두 참고 버티기로 했다.


다른 브랜드는 할 수 없고 우리만 할 수 있는 고유한 무언가가 아니면 쉽게 대체되고 빠르게 휘발될 것이었다. 우리만의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 흩어지지 않고 누적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주도권을 시장이 아니라 우리가 쥐고 있어야 했다.


그저 제품의 기능만을 말하는 광고들을 줄이고 우리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소재들을 온라인 광고를 통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2022년 5월, 제품 [바디드라이어] 와 공간 [섬세이 테라리움] 외에 사람들이 자연을 마주하며 떠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거제도 체험 프로그램과 테라리움 만들기 클래스를 오픈했다. 하지만 브랜드의 팬이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한 프로그램들은 원하는 만큼의 지속성을 우리에게 주지 못했다.


거제도 체험 프로그램 섬세이팀 사전답사
섬세이테라리움 내에서 진행되는 테라리움 만들기 프로그램

2022년 7월, 메인 시즌인 여름이 왔고 그 시기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오프라인을 통해 제품을 알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성을 높여보자는 생각으로 양양에 있는 메인 서핑샵인 서피비치 SURFYY BEACH 와 드리프터 Drifter, 그리고 양양 브리드호텔에 제품을 비치했다.

서피비치, 드리프터, 양양 브리드

동시에 팔로워가 많은 유투버, 인플루언서 와의 협업을 통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바디드라이어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그중 8월 말, 유세윤 님과 협업한 인스타 릴스 마케팅은 700만 뷰가 넘기도 했다. 유세윤 님 릴스 중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뷰를 보인 릴스였다.


하지만 매출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진정성이 있는 만큼 자극적이지 않은 마케팅들은 바로 회수되지 않았다. 아무리 방향이 좋아도.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아무리 누적되는 마케팅이더라도. 매출이 뒷받침되어주지 못한 채 버닝만 계속된다면 꾸준히 해나갈 수 없는 구조였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마이크 타이슨-

그렇게 메인 여름 시즌이 지나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정확한 우리 브랜드의 체력을 알고 싶었다. 광고를 하나도 하지 않았을 때 낼 수 있는 매출은 어느 정도 일까. 민낯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광고를 모두 멈추면서 그나마 내고 있던 매출마저 잃게 될까 봐. 미팩토리 때부터 광고 로아스 ROAS 지표를 통한 의사결정에 익숙해져 있던 마케팅팀 직원은 광고를 완전히 오프하기보다는 광고비를 점진적으로 줄여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2022년 9월 8일, 과감하게 모든 광고를 오프 했다.

당연하게도 광고를 할 때보다 절대 매출은 줄었지만, 충분히 유의미한 매출을 며칠간 이어갔다. 매출 규모는 줄었지만 오히려 이익을 확보했다. 물론 이전에 세팅해 둔 오프라인 접점들과 온라인 마케팅들이 있었으니 이어지는 매출이겠지만 그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팀도 나도 자신이 생겼다. 광고 없이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 우리답게 하는 고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2022년 10월, 리뉴얼을 하고도 뿌옇게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 브랜드와 자연의 연결 관계의 이유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겐 시대적인 슬픔이 보였다. 세상에 정보는 더 많아져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더 많이져서 그것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어지럽고 불안하게 했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더 답답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쪼그라든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그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었다. 내가 쪼그라 들었을 때 가장 많은 치유를 받는 방식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늘 마주하며 떠올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자연을 닮은 제품을 만들고, 맨발로 자연을 느껴보는 테라리움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을 거제도에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도, 테라리움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보는 경험을 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나와 우리 팀이 왜 이 일을 하는지가 또렷해졌다.  


2022년 11월, 나는 최진석 철학자가 계신 전라남도 함평으로 향했다. 기본학교라는 6개월 매주말을 함평에 가야 하는 코스였다. 이전부터 어렴풋해서 늘 입 주변에서만 맴돌고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던 것들을 명확하게 분류하여 설명해 내는 어른이었다. 나의 삶도. 나의 업도. 더 제대로 보고 싶었기에 주저 없이 내달렸다.

전라남도 함평 호접몽가

그곳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지속가능한 브랜드를 만드는 방법은 일등이 아닌 일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장르 안에서 추격하여 일등이 되어보겠다는 종속된 마음이 아닌, 흐름 그 자체를 만들어 일류가 되어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었다. 흐름을 만든 용기 있는 자만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주체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야만 대체되지 않고 지속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진석 교수님은 꿈이나 비전 같은 점잖은 말 대신에 야망野望 이라는 말을 쓰라고 하셨다. '야망'이라는 단어에서는 잘 훈련된 경주마의 거친 숨이 느껴진다고 하셨다. 꿈만 꾸는 것이 아닌 거친 숨을 쉴 수 있는 내면이 있어야 게을러지지 않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에겐 장르가 되어보겠다는 야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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