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혁이창 Apr 24. 2023

대항해시대 大航海時代

2023년 4월

22년 10월 29일. 기본학교 최종 합격을 위한 면접 날.

22년 11월 5일. 합격 후 기본학교 입학식과 다음날 새벽 첫 고산봉 일출산행.


두 번의 만남만으로도 '세상에 수준이 높고 낮음이 어디 있느냐! 취향의 차이지!'라고 했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 압도적이라 차라리 감동적이었던 경험은 수준 낮은 내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https://brunch.co.kr/@hyuk-e-chang/66


취향이 아닌 수준! 그러자 나는 수준이 높은 사람을 더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때 프레인의 여준영 대표의 이름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이 사람의 이름이 자주 들려왔다. 국내 최대 PR 회사의 대표라는 타이틀보다도 예전부터 여준영 대표가 블로그 등에 써 온 글들이 많이 회자되고 공감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팔로우하기 시작한 여준영 대표 인스타를 통해, 직접 기획한 전시를 프레인빌라 청담 사옥에서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본능적으로 찾아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편지를 적어, 에어샤워 한 대를 들고 프레인빌라에 찾아가 프레인 직원분께 전했다. 그날이 22년 11월 8일이었다.



열흘정도가 지나고서야 메시지로 답을 주셨다. 프레인빌라에서 차 한잔 하실 수 있냐는.

그렇게 티타임 약속을 정한 22년 11월 28일, 프레인빌라 1층의 카페 산노루에서 한 시간 정도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절반은 팬미팅에 찾아간 소녀팬과 같은 마음으로, 나머지 절반은 혹시라도 내가 찾고 있는 수준이 높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경계심을 품은 채.


한 시간이었지만 대화의 농도는 짙었다. 함평에서 만난 교수님처럼 그는 쓰는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서 적확한 의미를 나에게 전했다. 질문 하나에도 단단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적절한 수준의 위트와 유연함마저 갖춘 사람이었다. 표정은 내 수준에서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대에 서기 위해 이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투자해 달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장르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업계획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다짜고짜 편지를 남기고 찾아와서는 투자를 요청하고 장르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머리마저 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앞에 두고도 어떤 흔들림이나 주저가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여준영 대표님의 첫인상은 나무로 만든 닭 [목계양도木鷄養到] 같았다.   



https://brunch.co.kr/@hyuk-e-chang/53


다음 날 대표님이 요청한 사업 계획을 보내려 노트북 앞에 앉았다. 사실 장르를 만들 사업계획은 애초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무슨 제품이 나오고 올해는 매출을 얼마나 하려고 하는지 등의 뻔한 내용은 적고 싶지도 않았다. 수준이 높은 사람을 어설프게 설득해 보려는 객기보다는 완전하게 솔직하고 싶었다. 사업의 계획이 없다고 적었다. 어떻게 장르가 되려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당장 또렷한 그림이 있지 않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사업 계획을 물으신다면, 내가 장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 높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적었다.  


여준영 대표님께 보냈던 메일 내용 중


메일을 보내고 이틀 뒤 회신이 왔다.

그날의 대화와 메일을 볼 때 주주로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답이었다. 추가 질문이나 자료 요청 없는 담백한 회신이었다. 22년 12월 1일이었다.


여준영 대표님의 긍정적인 답을 받고 나서야 생활도감 법인의 대주주인 에이블씨앤씨 대표님 설득을 시작했다. 그러니 김유진 대표님도 물었다. 왜 이 딜을 만들어서 대주주를 프레인으로 변경하고 싶은 것인지.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프레인이 아니라 여준영 대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딜을 통해서 나에게 생기는 경제적 이득은 하나도 없었기에 나의 순수한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 김유진 대표님도 이 딜을 가능하게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딜 후에 여준영 대표님이 인스타에 남기신 "왜 회사를 프레인에 매각했나요?" 중


그렇게 23년 4월 7일, 프레인글로벌이 에이블씨앤씨의 지분 전체를 인수했다.


https://www.venturesquare.net/877737


프레인글로벌과 에이블씨앤씨 간의 계약서 날인과 대금 지급이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재무팀에 듣자마자, 나는 장르가 되기 위한 모험을 함께 떠날 SUMSEI 멤버들에게 메일을 적기 시작했다.


모험가들에게 보낸 메일 중


23년 4월 10일, 인수 계약에 대한 프레스 릴리즈 전날 저녁에 여준영 대표님과 식사를 함께 했다. 처음 만나 뵙고 4달 안에 정리된 딜이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우리의 대화는 처음 만났던 날과 다름이 없었다.

자잘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장르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기분 탓이었겠지만 말씀드렸다기보다는 부르짖음에 가까웠던 것도 같다.


거짓말처럼 이 딜이 완료되고 그다음 주인 4월 15일에 나는 기본학교를 졸업했다. 아직 혼자서는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나 자신이 알아서였을까. 나는 수준이 높은 다른 어른을 내 앞에 세웠다.


딜 완료 후 여준영 대표님이 사주신 맛난 디너인데, 부르짖느라 별로 못 먹음..
매거진의 이전글 장르가 되어보겠다는 야망野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