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부터 8월
2023년 4월 7일 날인을 하고, 4월 11일 프레인글로벌에 섬세이 브랜드가 합병된 소식이 공식적으로 릴리즈 되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매듭이 지어졌다.
2011년에 시작해서 4년을 운영하고 매각한 플렉스파워.
2015년에 시작해서 4년을 운영하고 매각한 미팩토리.
2019년에 시작해서 4년을 운영하고 매각한 섬세이.
4년에 한 번씩 생긴 매듭들의 모습은 겉에서 보면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이 분명히 달랐다. 물론 묶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다름이었다.
내가 가진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묶었던 첫 번째 매듭.
경제적 자유를 이뤄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묶었던 두 번째 매듭.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정하고 더 큰 모험을 떠나기 위해 주체적으로 묶어낸 세 번째 매듭.
이번에 묶은 세 번째 매듭은 나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두 번째 매듭으로 나는 자유를 사고 싶었다. 허나 돈으로는 자유를 살 수 없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는 데까지 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처박고 부단히 발버둥 치며 물살을 가로질러대다 숨이 목 끝까지 차서 고개를 들었을 때, 다행히 그곳에 교수님이 계셨다. 그 기본학교에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는 종속되지 않아야만 쟁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내가 하는 일도 그래야 했다. 종속적이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종속적이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상태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누군가 펼쳐놓은 그물 안에서 더 잘 살아보려 했을 뿐이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가장 먼저 걸어보겠다는 건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 두려움에 짓눌려 다시 종속됨을 선택하지 않도록 나를 지지해 줄 연대와 가문이 필요했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튼튼한 연대이자 가문이라 선택한 여준영 대표를 내가 택했다. 그리고 이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했고 그걸 받아주셨다. 그렇게 나는 내 매듭 중 가장 주체적인 태도로 세 번째 매듭을 묶어냈다.
꿈이 커지니 일의 성격도, 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지가 명확해지니 다음은 어디에 내가 발을 딛어야 할지가 보였다.
장르가 되어보겠다는 야망이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이 (나는 우주라고도 부른다) 선뜻 나를 돕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5월 11일. CES.
친구 하나가 내년 초에 라스베가스 가는 티켓을 끊었다고 했다. 근데 여행일정에 CES 세계가전전시회 가 겹쳐서 거기도 들리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나에게 CES에 나가지 않는지를 물었다. 아직 우리 브랜드에는 에어샤워 제품 하나뿐이기도 하고, 조금 더 제품 라인업도 생기고 브랜드 인지도가 쌓이면 나갈 생각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하는 동시에 내 안에서도 질문이 솟아 올라왔다. 정말 나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일까? 아니면 단지 해보지 않은 일이라 두려워 피하는 것일까. 언제쯤이면 CES에 나가는 게 걸맞는 브랜드가 된다는 것인가.
생각에 끝에서 나는 자잘해지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2024년 1월 라스베가스에 있을 CES 2024에 나간다. 전시에 나가본 적도, 전시를 구경하러도 가본 적이 없는 CES 지만 8 부스를 부킹 했다. 애매하게 나갈 것이라면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자 생각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정하지 못했더라면 섬세이에게 없었을 옵션임이 틀림없었다.
6월 13일. 산소 발생기.
늘 우리 브랜드의 방향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던 선배가 최근에 미팅한 산소 발생기를 생산하고 납품하는 업체를 만나고 나니, 섬세이가 생각났다고 했다. 부산에 본사가 있는 그 대표님이 서울에 출장을 오시는데 만나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처음 만나 대표님이 가진 산소 발생 기술에 대해 들었다.
20년 전 일본 출장에서 우연히 그들이 산소를 파는 모습을 보고 산소 발생 기술에 평생을 바쳤다고 하셨다. 해외의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본인만의 독자적인 기술을 만들어 본인이 이름을 붙이고 일부는 국제표준이 되기도 했다고 하셨다. 이전에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기관들을 설득하는데 쓰인 시간만 5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하셨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 기술을 인정받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소발생기술을 가진 가장 규모가 큰 회사가 되었다고 하셨다.
병원, 대기업 사옥 등 B2B 사업을 하시는 대표님께 B2C 사업 부분은 섬세이와 함께 해보자고 제안을 드렸다.
세상에 없던 흐름을 만들어 낸 대표님의 이 기술로, 나무보다 더 많은 산소를 뿜어내는 '내가 만든 나무'를 사람들의 집에 심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내년 출시를 목표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7월 4일. 해외 진출.
나에게 생긴 꿈에 의하면, 이제 섬세이는 글로벌 브랜드가 되어야만 했다. 꿈이 작았던 나에게 섬세이는 에어샤워가 국내에 없었던 장르를 개척해 시장을 만들어 내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만족해 왔다. 하지만 장르를 만들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가 직접 부여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이상 해외시장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베트남에서 다낭 개발을 맡았던 건설사 대표님을 찾아뵙고 베트남 진출에 대한 조언들을 여쭈었다. 그 후 바로 베트남 출장을 잡아 현지의 마케팅을 도와줄 대표님을 소개받고 바로 미국, 베트남 마케팅을 세팅했다.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삶의 철학이 생기니 그 기준으로 인해 내리는 결정들이 빠르고 정확해졌다. 그동안 고민했던 시간들이 길었던 것은 생각해 보니 내 삶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더 정확한 이유였다.
올해 겨울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과 베트남에서 에어샤워 판매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6월 25일 - 9월 3일. 어싱 캠페인
섬세이는 '자연을 늘 마주하며 떠올릴 수 있도록'을 외치고 있다. 나는 자연만이 주는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브랜드를 하면서 꼭 자연이 주는 그것들을 담아내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자연이 주는 그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구나를 느끼며 아쉬움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신발을 벗고 흙과 잔디 밟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같이 밟는 흙과 잔디이지만 맨발로 닿은 때에만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감정을 나는 다른 사람들도 설명할 수 없지만 수 없이 느껴봤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신발을 벗고 맨발로 딛어보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노력이 없이는, 자연이 주는 그것들을 제대로 맛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벗어던지는 데에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어서 그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됐던 것이 섬세이 테라리움이었다. 내가 원하는 수준의 자연을 마주하는 경험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허들을 낮추고 싶었다. 그렇게 테라리움을 운영한 지 2년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맨발로 걸었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 더 너그러워진 것 같아,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진짜 자연으로 불러내 보기로 했다. 맨발로 함께 걷고 흙과 잔디를 닮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맨발로 함께 걷고 서울숲의 쓰레기를 주워보고, 맨발로 함께 걷고 꿀술을 담그고, 맨발로 함께 걷고 자연을 카메라로 담고, 맨발로 함께 음악을 들으며 디스코를 추고 또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즐겼다.
내가 맞닿을 때 지었던 표정들을 그 사람들도 지었다. 내가 느낀 잠깐 생경하다가도 익숙한 그 기분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제품과 공간 외에도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고 그려본 것이 아니라 실제 실행하고 나서만 손에 잡힌 그 교훈들은, 거침없이 시도해 봤기 때문에 얻어낸 것들이었다.
9월 5일. 사무실 이사.
나는 나의 의지를 믿지 않는다.
다른 누구처럼 말고, 나답게 살아보겠다고 백날 외쳐봤지만 정작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몸이 닿는 공간을 유일한 곳으로 바꾸기를 차라리 택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공간이 나는 다르게 살아야 함을 말해주니, 그곳에서야 나는 아주 조금씩 나다워지는 중이다.
우리가 하는 일도 다르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장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를 믿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갖춰야만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공간이 우리는 다르게 일해야 함을 말해주는 그곳이 필요했다. 대체되지 않는 공간을 세 달째 찾아 헤매던 중에 하루는 무신사에서 투자팀을 이끌고 있는 영대형이 전화를 주셨다. 전에 영대형 집에서 티타임을 하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고, 그걸 알고 있는 형이 무신사테라스의 9층을 단독으로 쓰겠냐는 제안을 주셨다. 섬세이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매일 일하기 위해 들어설 때마다 우리는 대체되지 않을 사람이, 대체되지 않을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줄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무조건 우리가 쓰겠다고 말했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했다.
불안은 자유가 현실화되기 전인 가능성으로서의 현실모습이기 때문에, 그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어야 불안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는 건 자유롭지 않다는 말일테다.
장르를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요즘은, 매일매일이 당연하게도 불안하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약해지기 보다는 '와! 지금 나는 자유롭구나' 를 외친다. 게다가 이런 나의 모험을 지지하고 돕는 사람들이 나타나 내 곁에 함께하니, 앞으로의 여정이 두렵지만 두렵지 않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자유를 이제야 조금씩 맛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