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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Dec 28. 2023

융합의 밤

2023년 12월

어릴 때는 한 살 먹는 게 그렇게도 어렵더니, 어느 순간부터 가속이 붙어버려 두세 살 정도 먹는 건 가뿐하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이 상대적인 감각을 두고, 어릴 적에는 뇌에 사진을 찍어 저장하고픈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익숙한 매일이 반복되고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도 잃어 뇌사진첩 폴더에 남겨진 사진이 몇 장 안 되니 끄집어낼 기억이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이는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내게 올해는 유독 달랐다. 보통이면 몇 년 동안 모아야 했을 사진이 단 일 년 안에 쌓였다. 연초에 기본학교를 다니며 고산봉에 올랐던 기억들이 3-4년 전처럼 느껴졌다. 함평의 기본학교를 졸업하고, 브랜드를 프레인에 매각하고, 집 인테리어를 마치고 고독의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로 살고자 하는 멤버들로 새 팀을 구성해 사무실을 옮기고, 프레인빌라에서 워머 전시를 열고 이어 카메라타 전시까지.


와 이게 전부 올해였구나! 숨 가쁘게 달려온 일 년이니 지칠 법도 한데 오히려 에너지가 넘치는 이 기이한 현상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환경이 일 년 만에 참 많이도 달라졌다. 최진석 교수님, 여준영 대표님 등 전에는 책으로만 접하고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사람들과 이제는 함께 식사를 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기묘한 일이다. 단 일 년 만이었다.


동시에 이런 모험을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 온 사람들도 떠올랐다. 멋모르고 첫 사업에 뛰어들며 아무 대책 없이 도와달라고 했을 때 선뜻 일 년을 함께해 준 ㅅㅈ이가 없었다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을까! 소형가전을 해보겠다며 갑자기 채용한 대학생 ㅅㅇ가 5년째 내 옆에서 이 일을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을까! 화장품 사업하던 젊은 친구가 어떻게든 바디드라이어 만들어 달라면서 조를 때 돌려보내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개발하고 생산해 준 제조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을까!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모든 인연과 사건들이 점이었지만 그 점들이 이어져 결국 나는 이 가열찬 모험의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내 기준에) 가장 멋진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수많은 인연들이 있었음을, 그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지 않고 2023년을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앞으로도 이 모험을 더 가열차게 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들에게 전하고 응원과 감시를 바라고 싶었다. 그래서 송년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행사의 리드는 에어샤워를 시작할 때 대학생 신분으로 우리 팀에 합류하여 5년을 버티며 이제는 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ㅅㅇ가 맡았다. 어찌 보면 매출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이 행사의 준비는 인사팀이나 총무가 맡기 마련이지만, 팀과 브랜드의 철학은 이런 행사의 퀄리티에서 확연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서로가 동의했다. 목적은 감사와 다짐의 말씀을 올리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컨셉은 각자 강점을 가진 개개인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는 융합이라는 방향을 ㅅㅇ가 잡았다. 이는 ㅅㅇ가 이과 출신이라 가능한 일이었는데, 각 분자들이 가진 원소의 종류가 다르고 그런 분자들의 결합을 구체화된 교구 키트를 활용해 시각화하여 표현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탄생한 행사 포스터

초대된 50분의 주소로 교구 키트와 함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 의 '다중지능이론'에서 제안한 지능 목록을 보내드렸다. 스스로 어떤 강점을 가진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어떤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떠올려 볼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자 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른 강점들을 지닌 주체성을 가진 객체임을 인지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잠시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 각기 다른 강점을 지닌 개개인들이 융합하여 핵융합 nuclear fusion을 만들어 새롭고 new 명확한 clear 융합 fusion을 도모해 보자는 웅장한(?) 의미도 덤으로 담으며.



그렇게 정한 자신만의 색깔을 순서대로 3가지를 알려주시면 한 명 한 명 다른 색이 배합된 캔들을 준비하기로 했다. 굉장히 번거롭고 챙길게 많아지는 방향이었으나, 오시는 게스트들이 행사의 의미를 적확하게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아보자고 모인 우리 팀은 행사 선물의 디테일까지도 허투루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팔로우업을 ㅅㅇ가 해냈다..)


그렇게 준비하여 모든 게스트들 앞에 놓인 1. 본인강점 분자모형 2. 분자모형의 색으로 배합한 캔들 선물


그렇게 행사 당일인 22일 금요일이 되었다. 나는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준비한 '감사와 다짐의 말'을 리허설하고 일찍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더 서둘러서 집에서 나왔다. 판교에서 서울을 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인 빨간색 광역버스를 잡아탔다. 문제는 연말에다 금요일이다 보니 판교에서 빠져나가는데만 40분이 걸렸다. 어렵게 도착한 경리단길 앞 정류장에서 잡히지 않는 택시를 뒤로하고 마을버스를 타고서야 하얏트 호텔 정문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나온 나도 결국 20분 전에야 행사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마을버스 안에서 이미 많은 게스트들로부터 늦게 도착할 것 같아 죄송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을버스에서 내리고 바로 마주한 아름다운 하얏트의 밤


예정되었던 순서는 내가 준비한 '감사와 다짐의 말' - '뷔페 식사' - '재즈 공연' 순이었는데, 제시간에 도착할 분이 반도 안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건 늘 하나 없음이 이제는 하나도 놀랍지 않은 나는, 게다가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멤버들까지 있으니 흔들림 조차 없었다. 행사를 준비한 ㅅㅇ에게 식사를 먼저 할 수 있도록 순서를 바꿔달라고 말했고 처음에는 불가하다고 했던 호텔 측이 어찌저찌하여 7시 시작이었던 뷔페 식사 시작을 6시 30분까지 준비할 수 있게 변경했다고 ㅅㅇ는 알려주었다.


한분씩 게스트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최진석 교수님을 포함한 기본학교 동지들, 여준영 대표님을 포함한 프레인 임원들, 제조사 대표님들, 내 첫 창업을 도와준 고등학교 친구부터 어싱 캠페인을 함께한 대표님들, 그리고 그동안 나에게 영감이 되어준 분들까지. 나를 이 모험까지, 이 무대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광경은 나의 기분을 묘하게 했다. 고마운 마음부터 책임감까지 뒤섞인 묘한 기분이었다.


초대한다고 모실 수 있는 분들인가..


테이블에 앉은 게스트들은 처음 본 다른 게스트와도 서로의 강점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며 스몰챗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분 한 분 다르게 준비한 캔들 선물을 보면서도, 뻔한 현수막이 아닌 무대 디테일에 대해서도, 섬세이가 이런 사내 행사마저도 허투루 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말씀들을 주셨다. 이 행사를 리드하고 준비한 사람은 누구인지, 또 행사를 안내하고 영상을 찍고 있는 우리 멤버들을 보면서도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건강하고 놀랍다는 말씀들을 주셨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뷔페가 준비되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를 시작한 지 40-50분이 흘렀고, 식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섬세이 멤버들이 각 테이블에 놓인 분자모형을 모아서 미리 준비한 모두의 이름이 새겨진 대형 폼보드에 옮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다르게 선택한 분자모형을 한 곳에 모아 보실 수 있도록 했다. 융합을.



이어서 내가 준비한 '감사와 다짐의 말'을 시작했다. 자유를 원해서 시작했던 창업, 매각을 통한 경제적 자유를 얻었지만 원했던 자유를 쟁취하지 못해 좌절했던 시간들, 극복하려 쳤던 발버둥부터 그러다 닿은 최진석 교수님과 함평, 박차를 가해 달려들었던 여준영 대표님과의 만남, 프레인으로의 합병, 그래서 이제 해보려는 나의 모험과 나는 어떻게 살다 갈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30분 정도로 준비한 스피치를 하는 내내 가장 눈이 많이 마주쳤던 분은 나와 같은 테이블에 배정된 프레인 TPC 소속의 오정세 배우님이었다. 뒤에 이어질 재즈팀의 공연 시작시간이 늦어지지 않도록 스피치 시간을 맞추느라 급해지려 하다가도,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오정세 배우님의 눈빛과 마주치면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고 다시 나의 속도를 찾았다. 배우님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꽤 진부한 표현이지만, 배우라는 업을 가진 사람이 말해준, 심지어 누구나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가 직접 말해준 그 표현은 앞으로도 내 인생 손에 꼽을 칭찬이었다.


그리고 준비한 공연은 재즈 콰르텟이었다. 공연을 재즈팀으로 준비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기본학교 동지인 ㄷㅎ님이 한 달 전쯤에 재즈 애니메이션인 '블루 자이언트'를 추천했었다. 혼자 영화관에서 보고서는 너무나도 좋아 섬세이 멤버들이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바로 다음 날 표를 끊어주어서 보고 오시라고 했다. 색소폰, 피아노, 드럼의 다른 악기들이 각자의 소리를 내고 또 함께 연주하는 모습들이 '융합'이라는 이번 행사 주제와도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이 들어 재즈팀으로 공연을 준비했다. 서울숲 재즈페스티벌을 주최 운영하는 페이지터너 대표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영국 출신 트럼펫연주자이자 보컬리스트인 데이먼 브라운을 섭외했다. 그와 함께 세션으로 온 기타, 베이스, 피아노 연주자들도 수준급이었다. 행사가 모두 끝난 후에도 재즈 공연에 대해 만족한 감상평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트럼펫도 대단했지만 보컬도 압도적이었던 데이먼 브라운


재즈 공연이 진행되는 중에 나는 뒤쪽으로 빠져 내가 초대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넣으며 감사한 마음과 책임감을 한번 더 다졌다. 그러다 비어있는 최진석 교수님 옆 자리가 눈에 들어와 앉았다. 교수님은 스피치에서 밝힌 섬세이의 철학과 방향을 들어보니, 문명이 흘러갈 맥을 제대로 짚어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 주셨다. 그러면서 해주고 싶은 메세지가 담겨 있는, 최근에 교수님이 기고하신 글을 꼭 일독해보라는 말씀도 주셨다. 장르가 되어보려는 나의 모험이 옳은 방향을 겨누고 있다는 말씀은 그 어떤 응원보다도 기쁘게 다가왔다.


공연이 끝나고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8시 30분쯤이었다. 한 분씩 인사를 드리고 배웅을 드렸다. 행사에 와서 새로이 멋진 분을 알게 되었다며 따로 인사를 주신 녹기전에 사장님을 비롯하여 참석해 주신 모두의 표정이 밝았다. 어떤 테이블은 대관이 끝나가는 10시가 다 되어갈 때까지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가셔야 우리도 정리를 할 수 있다며 겨우 일으켜 세웠다. 행사를 준비하느라, 게스트들을 안내하느라, 테이블의 밍글링을 담당하느라,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촬영하느라 섬세이 멤버들은 지칠 법도 한데 표정들은 모두 후련해 보였다. 하얏트 근처의 bar로 뒤풀이를 잡고 정리를 하던 중에 메세지가 울렸다.


교수님이셨다.


"창혁, 자랑스럽다. 건투를 빈다."


이렇게 살아볼 수 있게 방향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잘 살아보겠다고. 답을 드렸다.


이어서 바쁜 연말 일정에도 자리에 함께해 주신 여준영 대표님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저에게, 저희 팀 멤버들에게도 많은 응원이 되었다고. 내년도 많이 기대해 주시고 많이 도와달라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행사였어요. 직원들 회포 잘 풀어주세요."


라는 답을 주셨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시지 않는 성향의 대표님인걸 세상이 다 알기에 더 묵직했다.


뒤풀이 장소로 옮겨 함께 고생한 멤버들에게도 교수님과 여준영 대표님의 메세지를 전했다.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고 악착같이 해낸 ㅅㅇ도 후련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나는 송년행사를 하고 싶다고만 말했다. 융합이라는 컨셉도. 강점을 표현해 낸 분자모형도. 개인화된 캔들선물도. 테이블 배치도. 공연 아티스트 케어도. 모두 ㅅㅇ가 만들고 ㅅㅇ가 메이드했다. 처음 이 회사에 들어온 그때부터 5년의 시간이 모두 떠오를 정도로 벅찼다고 말했다. 그의 후련함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세이세이 섬세이~


새벽 3시까지 이어진 뒤풀이는 결국 bar 사장님과 함께 가게 문을 닫고서야 마무리됐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어제 챙겨 온 내 강점의 색들로 섞여있는 캔들이 보여 워머에 올려보았다. 어제의 감정들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가슴 한편이 뜨듯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험은 끝이 없을 것이고 그저 모험의 나날들이 내가 모험하는 목적이니, 어제와 같이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느끼고 감동하고 전율하며 살고 싶다는.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던 4년 전의 다짐이 아주 조금은 내 삶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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