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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Jan 16. 2024

CES 2024

2024년 1월

오늘 새벽 5시 30분, 인천에 도착했다. 함께 다녀온 ㅅㅇ와 ㅎㅈ의 얼굴에는 치열했던 여덟 밤의 출장과 12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피곤함이 묻어났지만, 개운함이 보였다. 당장 바이어를 구해서 수출할 수 있는 경로를 뚫고 온 것도 아니었지만 다음으로 이어질 점을 찍고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만들어 낸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 개운함이 그들의 얼굴에만 묻어있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소에, 내가 모를 리 없었다.


CES는 작년 5월까지도 전혀 계획에 없었다. 5월 11일, CES 안 나가고 뭐 하냐는 ㅊㄱ의 전화 한 통화에 벌어진 일이다. 보러 간 적도 없는 박람회에 나가라니 참 황당했다. 국내도 아니고 세계적인 박람회에 우리가? 작년 5월이면 제품도 에어샤워 하나뿐이었는데, 우리가? '허허 황당하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건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이 늘 황당하게 살으라고 해주셨던 말씀 그대로. 그날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통화에서 ㅊㄱ와 나는 이미 부스컨셉을 정했다. 모두가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박람회에 나가, 모두 가리고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세우기로. 그리고 제품 소개를 듣기 전에 그 안을 맨발로 들어가 테라리움처럼 몇 가지 자연 공간을 체험하고 나오도록.



6월 부스를 디자인할 업체를 선정했다. 선정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하게 비교해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소개받은 업체와 함께하기로 했다. 업체는 CES 전시 부스를 설치한 경험은 많았으나 내가 요구하는 체험공간과 같은 컨셉은 구현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전시를 하는 곳은 미국이라 맨발로 들어가라고 하면 아무도 체험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를 말렸다. 나는 한 번도 구현해 보신 적 없으니 이번에 해보시면 참 좋은 경험이 되실 거라고 했다. 미국이라 맨발이면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돌려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우리 담당 본부장님은 허허 웃으며 황당해하셨다. 잘되어가고 있구나 싶었다.


부스 예약부터 부스 디자인 업체 컨트롤, 비행기표 예약부터 해상과 항공 보낼 물류를 담당할 창고 업체 컨트롤, 제품과 디자인목업, 명함, 리플렛, 유니폼 등등 실무를 챙겨야 하는데 믿고 맡길 사람으로 먼저 떠오른 것은 ㅎㅈ이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CES로 합류할 해외 업무를 맡아 도와주고 있는 팀도 모두 남자였기에, 여자인 ㅎㅈ이 가게 되면 비용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CES에 가는 멤버가 모두 남자라면 미친 듯이 올라가 버린 호텔비를 아끼기 위해서 큰 방을 잡고 다 같이 한 방에서 지낼 계획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반 실무를 도와주고 있던 ㅎㅈ에게 전화를 걸어 CES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ㅎㅈ은 출장 비용이 본인 때문에 오르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고민되긴 하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잠시만 고민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고, 결국에는 여자 혼자 쓸 방을 하나 더 잡더라도 ㅎㅈ을 데려가기로 했다. (다녀온 지금은 ㅎㅈ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의 표정은 절대 개운하지 않았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출국은 1월 7일 일요일 밤이었다. 전날인 토요일에 ㅅㅇ, ㅎㅈ과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유는 기본학교 동지이자 이스트인디고 브랜드를 운영하는 ㅅㅇ와 ㅁㄱ가 만들어 준 유니폼이 출국 바로 전날에 나와 픽업하기 위해서였다. 넉넉하지 않은 스케줄이었는데 동지들은 CES를 가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미래 가전 연구자들'이라는 컨셉까지 잡아 유니폼을 제작해 주었다. 최종으로 나온 실물을 피팅해 보자마자 만족스러움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실제로 CES에서 우리 부스가 일등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니폼은 CES 부스 전체를 통틀어서 일등이 확실했다. 다른 부스의 스탭들부터 레스토랑이나 쇼핑몰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니폼이 멋지다는 칭찬과 함께 어디서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물었다. 피팅 후에 각자 짐을 싸고, 나는 유니폼 하나를 챙겨 프레인빌라로 향했다. 따로 연락은 안 드리고 출국하기 전에 여 대표님께도 유니폼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문 앞에 두고 올 생각이었다. 벨을 눌렀지만 역시나 계시지 않아 문 앞에 두고 가려는 순간, 여 대표님이 산책하고 들어오시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 유니폼을 건네니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와 함께 몇 시간 뒤 우리 유니폼과 함께 응원의 메세지를 남겨주셨다.



7일 일요일 밤 9시, 인천에서 출발해서 11시간을 날아갔지만 시차가 있어 우리는 출발했던 시간보다 이른 7일 일요일 오후 3시에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CES 입장할 수 있는 배지를 나눠주고 있었기에 각각 받아 들고 공항을 벗어났다. 호텔로 가는 우버 픽업 공간이 따로 있어 그 길을 따라가는 길에 라스베가스 사막의 탁 트인 풍경을 마주하고서야 정말 우리가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호텔은 우리 CES 부스가 설치되는 베네치안 호텔의 길 건너 맞은편인 미라지 호텔로 잡았다. 대충 그렇다고는 들어왔지만, 막상 우리가 가려고 알아보니 CES 행사 주간에는 비행기표도 호텔 숙박비용도 너무나도 비쌌다. 조금이라도 경비를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건너편 미라지 호텔에 남자 5명이 쓸 큰 방 하나와 여자 멤버인 ㅎㅈ이 쓸 방 하나를 잡았다. 미국에서는 섬세이의 미국 세일즈를 챙겨주고 있는 ㄷㅇㅂ, ㅈㅁ, ㅅㅇ이 합류했다.


다음 날인 월요일은 전시 전날이라 우리 부스가 설치되고 있는 현장을 체크하기 위해 베네치안 호텔 내에 있는 컨벤션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왜 CES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전시회인지가 느껴졌다. 전시장 사이즈 외에도 미팅룸 숫자부터 전시관끼리 오고 가는 셔틀버스들까지도 압도적이었다. 우리 부스가 설치되고 있는 Hall C를 통해 들어가니 바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이런 형태의 부스를 진행해 본 적 없다고 했던 업체였기에 우려했던 부분들이 있었으나 생각보다 완성도 있게 부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국에서 직접 보고 왔던 6미터짜리 나무도 무사히 잘 도착해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했던 대로 모두 본인들의 브랜드 네임을 천장에 걸었고 부스를 최대한 오픈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동선을 확보해 두었다. 정반대로 브랜드 네임을 거는 대신에 나무를 심고, 부스를 오픈하는 대신에 모두 막아버린 우리 부스를 보니 묘한 짜릿함도 있었지만 실제 참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작지 않은 불안감도 그 안에 섞였다.


9일 화요일. 전시 첫날.


어제와 같은 길이었지만 우리와 같은 수많은 참가업체 사람들이 쏟아지듯 전시장으로 향했다. 세계 무대에 자신의 기술과 제품을 알려보겠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에너지가 넘쳤다. 부스 내에 제품들을 ㅎㅈ이 기획한 대로 세팅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장까지 막아 어두운 첫 공간에서 자갈들을 밟으며 지나고, 머드같이 느껴지는 클레이가 깔린 동굴존으로 진입하면 워머들의 불규칙한 빛을 볼 수 있도록 세팅했다. 그다음 두 번째 공간인 모래가 깔린 바다로 들어가면 에어샤워 와 페블탭을 만나 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을 지나면 마지막 공간인 숲에서 6미터짜리 나무와 함께 개발 중인 산소발생기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모든 공간에서는 각 공간에 맞는 사운드와 향까지 ㅎㅈ이 준비했다. 다만 아쉬웠던 건 실제 공간들에 돌과 모래, 바크들이 깔려 있다 보니 맨발로 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고소의 나라 미국에선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ㅎㅈ의 판단에, 신발을 신고 경험하는 방향으로 타협한 부분이었다.



4일 동안 함께 할 현지에서 섭외한 미국인 스탭 2명도 조금 일찍 도착하여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준비는 마쳤고 입구 쪽을 보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10시에 게이트를 오픈하자마자 참관객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부스에도 사람들이 곧장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내부를 체험할 수 있게 준비한 대로 한 두 명씩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대기하게 했다. 대기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무만 덩그러니 보이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하얀 박스의 부스는 사람들을 멈춰 서게 했다. 내부를 체험하고 나와서 에어샤워를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신발을 벗고 올라서도록 요청하면 큰 거부감 없이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사람들은 바디드라이어 자체를 각자 다른 이유로 생소해했지만 올라서면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멤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브랜드의 철학과 제품에 대해서 소개했다. 외국인들이 'SUMSEI'를 발음하고 'Air shower'를 말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부여한 대로 사람들을 발음하고 말하고 있었다.


6시가 될 때까지 단 한순간도 줄이 끊기지 않았다. 마무리하고 입구의 스탭이 입장시킬 때마다 카운트한 숫자를 보니 950명 정도가 부스를 경험했다. 전시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30초에 한 명씩 관람한 것이었다. 폭풍같이 지나간 첫날이었지만 오늘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 랩업 미팅을 가지고 내일 바로 반영 가능한 것들을 정리했다.



10일 수요일. 전시 둘째 날.


첫날 참관객들에게 프리젠테이션 해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해서 제품의 위치나 이미지, 영상을 변경했다. 두 번째 날에도 부스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다른 게 있었다면 체험존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들어가거나 맨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쯤 지나고 보니 참관객들은 다 맨발인데 일하는 우리들이 신발을 신고 있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우리도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응대를 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멀리서 궁금함을 못 참고 우리 부스로 오는 와중에도 당연한 듯 주섬주섬 신발을 벗기 시작했고, 모르고 신발을 신은채 부스에 올라온 몇몇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맨발로 공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동굴과 바다를 지나 마지막 숲 공간을 통해 밖으로 나올 때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행복한 웃음과 함께였다. 자연 안에서 우리는 가장 자연스럽다고 믿어왔던 것처럼, 모두가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술을 통해 그런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미래 가전의 역할이라 생각하는 우리의 비전을 전하면 지구 반대편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참관객들을 응대하면서 나 역시도 우리 브랜드와 제품을 생경하게 볼 수 있었고 의미 있는 피드백과 영감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제시한 미래 가전의 역할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큰 응원으로 다가왔다.



11일 목요일. 전시 셋째 날.


이틀 동안 1,700명 가까이 응대한 우리 팀은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나부터도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부었고 몸살 기운이 있었다. 미국팀 ㄷㅇㅂ과 상의하여 전시를 하고 있는 베네치안으로 숙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멤버들 컨디션이 우선이었다.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뒤로 내빼는 사람이 없었다. 농담으로 유니폼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전투복이라고 말했었는데, 진짜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줄이야..


둘째 날부터 이어져 이제는 모두가 양말이거나 맨발인 것이 당연한 부스가 됐다. 전시를 참가한 다른 부스의 스탭들도 우리 부스가 궁금하다며 놀러 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신기한 체험이 있는 부스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찾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셋째 날에는 CES 2025 부스를 예약하는 행사도 잡혀 있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 전시일지 판단하기에는 전시 중이라 어려웠지만, 직접적인 효과가 얼마나 있는가와 상관없이 나는 매년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섬세이가 가지는 미래 가전의 역할에는 기술이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르를 만드는 브랜드가 되는 데 있어서 이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기술임을 알았다. 기술이 있는 정도가 아닌 선도하는 기술을 확보해야만 세계 무대에서 승부를 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적어도 매년 CES에 나와야 하는 환경을 구축하면, 그것이 나를 게으르지 않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12일 금요일. 전시 마지막 날.


다른 날은 오후 6시까지 전시였지만 마지막 날은 오후 4시에 끝나고, 이미 많은 참관객들이 떠나기도 해서 꽤 한산할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래서 팀을 두 개로 나눠서 세 명씩 메인 전시들이 있는 LVCC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오후조로 LVCC에 들러 LG, 삼성, SK 등 한국 기업들이 준비한 부스들을 돌아봤다. 이미 다리가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져서 많이 돌아볼 체력도 되지 않아 큰 부스들만 돌아보고 돌아왔다.


4시부터 부스 정리를 시작했고, 저녁은 스테이크하우스에 가서 서로의 치열했던 4일을 격려했다. 무엇보다 이 큰 행사에 실수 하나 없이 마무리 지은 ㅎㅈ에게 모두가 축하와 고마움을 전했다. 준비하기에는 촉박했던 6월부터 투입돼서 거의 5억에 가까운 예산이 든 행사를 혼자서 챙겼다. CES 기간 내에 프레인을 통해 내보내는 CES PR 기사들까지 챙겼다. 와인잔을 들고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니 그제야 ㅎㅈ도 7개월 동안 안고 있던 긴장을 내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팀의 체력왕인 ㅅㅇ도 침대에 앉은 채 잠들어 버릴 정도로 몇 인분을 해줬다. 미국팀 ㄷㅇㅂ, ㅈㅁ, ㅅㅇ도 다 목이 부어서 하루 종일 커프드롭 캔디를 입에 물고 있었어야 할 정도였다. 몸살감기약을 나눠먹으면서 버텼음에도, 마지막 날까지 누구 하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치열함 안에서도 유쾌함을 놓치지 않았다. 좋은 팀이었다.


저녁을 먹고 밤 10시에는 Sphere를 경험했다. 놀랍지 않았다. 화면의 코끼리와 기린이 실제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앉은자리에서 세계 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기술을 통해 섬세이가 자연을 늘 마주할 수 있게 해 보려는 방향과 같았기에 놀랍지 않았다. 인류가 나아가려는 방향이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같다는 것을 한 시간 내내 Sphere는 증명해 주었다.



CES 전시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 자리에 앉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는 넓고 나는 좁았다.

좁은 나의 세상에서 만든 나의 브랜드고 나의 철학이었지만,

그 넓은 세계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이곳에서 확인했다.


나는 좁았지만 나의 시선은 좁지 않았음에 작은 안도가 있었고,

동시에 이 넓은 세계를 다 디뎌야 함을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설렘만이 남았다.


모험다운 모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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