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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Feb 15. 2018

더 잘 피 흘리기 위해, '피의 연대기'

본격 생리 탐구 다큐 <피의 연대기>를 보고

이십 대 초입에 김훈 작가의 소설을 정말 좋아했다. 한국 소설 독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도 그의 힘 있는 문장을 흠모했다. 가장 좋아했던 소설은 <칼의 노래>였지만 그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강산무진>을 특히 좋아했다.


소설가 김훈의 첫 번째 소설집 <강산무진>에는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화장>과 더불어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언니의 폐경>이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두 소설을 정말 숨죽여가며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구나.


특히 <언니의 폐경>은 서로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은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인생의 황혼기에 느낄 법한 고독함과 허무함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다. 그때의 나는 소설의 내용에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SNS상에서 <언니의 폐경>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졌다. 여성의 생리를 묘사하는 구절이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였다.


오고 가는 주장과 논평을 여럿 읽어보았을 때 나는 독자들의 공분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묘사가 현실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면 그 안에 담긴 것이 삶의 정수든 문체의 유려함이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일 것인가.


김훈 작가의 문장 실력과 작품 세계 그 자체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한 시대의 문장가이고 그의 소설이 가지는 문학성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논란이 되었던 바로 그 지점이 김훈이라는 작가의 한계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는 아직도 세상에 이해될 권리가 있는, 그럼에도 은폐되고 터부시 되고 있는 삶의 한 단면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쓸 수 있다고 배웠다. 그게 체험이 되었든 간접적 경험을 통한 추체험이 되었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겸허하게 한 걸음 물러나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화 <피의 연대기>는 '본격 생리 탐구 다큐'라는 소개에 걸맞게 생리라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한국에서 여성의 생리를 적극적으로 다룬 거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과 연출자에게도 첫 작품이라고 하니 여러모로 의미 있는 첫걸음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피의 연대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생각보다도 더 발랄한 영화였던 것이다. 은연중에 나는 생리를 진지한 것, 아픈 것, 불쾌한 것이라는 생각과 결부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쉽고 친숙하게 생리 문화를 소개하겠다는 제작자의 의도는 적중한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생리는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임을 배웠다. 무지는 부끄러움이 아니지만 배운 뒤에 오는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다. 배움이 늦을수록 부끄러움도 크다. 우리에게 더 이른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누군가에게는 요즘 젊은이들의 관심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특권 행사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귀 아픈 불편일 것이다. 젠더 문제 말이다. 아는 것도 없고 지은 죄도 많은 나로서는 늘 송구스러운 주제다. 그러니 이해하고 바꿔가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너는 페미니스트냐고 묻는 것보다는 이 영화를 보는 편이 생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탈식민주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은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방할 수 없다고 적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적기까지 그리 큰 고민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고민과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문장처럼 ‘더 잘 피 흘리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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