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신경 써서>와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고
항공성 중이염을 앓았다. 몇 주 전의 일이다. 항공성 중이염은 잦은 비행 후에 찾아오는 질환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빠른 고도 변화를 겪은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귀가 아프거나 먹먹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보통은 침을 삼키거나 하품을 하면 금방 나아진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일본에 도착한 직후에 내 귀가 여전히 먹먹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행기에서 착륙 방송이 흘러나오는 동안 한순간이지만 왼쪽 귀에서 쨍한 통증을 느낀 터였다. 입국 수속을 하고 짐을 찾는 부산한 과정 속에서 누군가에게 내 귀의 상황에 대해 토로할 겨를은 없었다. 우선 일행을 따라가며 아, 아 하는 식으로 말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부쩍 소심해진 내 목소리였다.
정확한 의학적 소견은 아니지만 내 만성적인 비염 탓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 빈약한 신체 지식에 비추어보자면 귀 안팎의 압력 차가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도 극복되지 않았던 것 같다. 라오스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떠난 일본 여행 자체가 귀의 피로를 심화시켰으리라는 점도 쉽게 예상 가능하다. 불통, 이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내 귀도 답답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엄숙하고 비장하게 시작했지만 귀의 먹먹함이나 그로 인한 불편함은 며칠이 지나자 자연스레 사라졌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회복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일본의 전철 소리도, 신주쿠의 시끌벅적함도 아무런 문제 없이 즐기고 왔다. 되려 신칸센의 무색무취한 고요함 때문에 멀미가 나서 곤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이염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가장 큰 불편함은 귀 내부의 이질적인 먹먹함도, 왼편에 앉아 떠드는 사람의 말에 알아듣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야 했던 순간의 난감함도 아니었다. 가장 괴로웠던 점은 내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음량과 억양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지 항상 의심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말하기의 첫 번째 조건이 듣기라는 사실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내 보잘것없는 글쓰기에도 슬럼프가 왔다. 제삼자 입장에서는 조금 신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짓에 슬럼프가 오다니. 내 나름대로는 일상을 흔들만한 우환이다. 잘 쓰지는 못해도 꾸준히 쓴다는 것, 그게 나라는 인간이 가진 속성의 일부라는 게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못하고 있다.
며칠간 스스로를 진단해보려 갖은 애를 썼다. 책을 마구잡이로 쌓아놓고 뒤져보기도 하고 자극이 될만한 영화도 눈 앞에 들이밀었다. 음악은 또 얼마나 틀어놓았는지. 효과는 없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진 지식이나 예술적 영감 같은 걸로 글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그럴 능력도 없다.) 그런 투입으로 해결이 될 리가 없었다.
다만 참고할 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소설 하나와 에세이 하나. 먼저 소설이다.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에는 <신경 써서>라는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내와 결별하게 될 위기에 닥쳐있는 '나'는 귓구멍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귀지 때문에 고통받는다. 귀에 오일을 흘러 보내는 등 갖은 애를 써보지만 귀지는 빠질 기미가 없다. '나'의 알코올 중독과 동문서답에 지친 아내는 마지막으로 짐을 싸서 '나'에게 이별을 고한다. 아내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말길을 알아듣지 못하던 '나'는 아내가 떠나고 나서야 귀지를 꺼내는 데 성공한다. 집안은 적막으로 가득 차있고 소설을 끝이 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소통'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요컨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건 귀지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럼 아내와 '나'의 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걸 무엇이었을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써서' 들으려 하지 않았던 '나'의 독단이나 무관심, 혹은 유아론적인 사고가 아니었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다음은 소설가의 직접적인 소견서다. 김중혁 작가의 창작론을 담은 에세이집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는 그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조건이 담겨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좋은 글에는 좋은 대화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인물과 인물이 랠리를 펼치듯 대화를 이어가는 소설은 그가 내건 조건을 일단 충족시키고 시작한다. 온통 묘사로 들어찬 소설에도 좋은 대화가 존재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의식이라는 건 나와 나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대화를 써 내려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좋은 글의 또 다른 조건은 '상상'과 '체험'이다. 그렇다면 인물과 인물 간의 말을, 나와 나 사이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힘 또한 '상상'과 '체험'이라고 추측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가 여러 지면을 할애해 '역지사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감히 결론 내려보고 싶다.
먼 길을 걸었지만 숲을 한 바퀴 돌듯 다시금 내 고민 앞에 섰다. 내 멈춰버린 글쓰기에도 비슷한 종류의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말하기의 자격은 듣기라는 것,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주위 환경이나 물리적 장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좋은 글의 조건은 일방적인 필력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자세라는 조언. 처방전을 받았으니 이제 약을 먹을 일만 남았다. 경과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