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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Nov 28. 2017

우리는 이제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더라도

글쓰기의 동력에 대하여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하나. '칠보작시'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일곱 걸음 만에 시를 한편 지었다는 이야기다. 조조의(삼국지의 그 조조가 맞다) 셋째 아들 조식은 글 솜씨를 비롯해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조식의 형 조비는 조식을 늘 시기했는데 훗날 자신이 황제가 되자 조식을 죽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조비는 조식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만일 짓지 못한다면 죽이겠다는 것이다. 모든 전설이 그렇듯 조식은 일곱 걸음 만에 자신을 죽이려던 조비마저 눈물을 흘릴 만한 시를 지어 올리고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나는 '와, 좋겠다.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짓다니...' 따위의 감탄을 내뱉었지만 다시금 이 이야기를 들춰보는 동안에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집어치워야 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일곱 걸음 만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죽이겠다니. 조식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목숨이 달려있는 일에는 그만큼의 기지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시를 지었다고 조식이 행복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길이 남을 명작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오늘 죽을 판인데 그런 흐뭇함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고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실은 어제오늘 글쓰기에 대한 질문들을 엿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 '쓰고 싶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헤쳐나가는 법'과 '너무 쓰기 싫은 글을 아무쪼록 잘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같이 공감되는 말뿐이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내내 저 두 가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질문에도 일곱 걸음 만에 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입김 호호 불어가며 겨우 떠올린 대답은 저 두 질문이 마치 똬리를 튼 한 쌍의 뱀과 같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쓰고 싶은 글을 가장 잘 쓸 수 있을 때는 쓰기 싫은 글을 써야 할 때이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과제를 다 하면 과제가 생기는 상황이 오거나 온몸이 부서져라 배배 꼬아가며 쓰기 싫은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 가끔 툭툭 던진다. 간만에 떠오른, 수면 위에서 내뱉는 한 뭉테기의 호흡 혹은 저 멀리서 뛰어왔지만 결국 한발 늦어 건너지 못한 횡단보도 앞에서의 동동거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말들은 대체로 조악하지만 생리현상의 자연스러운 발현 같은 것이어서 우리도 모르는 새 습관이 된다. 사람이 가진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습관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를테면 바쁜 일상 속에서도 글쓰기는 습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이고 낙관적인 말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선망하는 이의 말을 조금 빌려보자. 내가 감격에 젖어 가쁜 숨 쉬어가며 읽는 글의 필자 중 한 명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이다. 그는 그의 숱한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었다. 문학 비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영화 비평이 영화가 될 수 없고 회화 평론이 회화가 될 수 없지만 문학 비평은 문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기억에 의존한 부정확한 워딩이니 비판은 삼가길 바란다. 그는 편협한 사람이 아니니 위와 같은 말을 한 데에는 문학에 대한 그의 순애보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말이 조금 옆으로 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문학 비평이 문학이 될 수 있듯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말도 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당연한 진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그러니까 우리가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글을 읽었을 때 좋았으며 어떤 글을 닮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글을 쓸 때 즐거운지를 적어보는 것이다. 조금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스스로가 말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방법이 아닌가 한다.

여기까지 썼는데도 상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건 글쓰기의 존재론적인 문제도, 부적절한 글쓰기 방법을 제시한 탓도 아니다. 그건 답을 하는 사람의 문제겠지. 답을 하는 사람의 무언가가 질문을 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그건 필히 답을 하는 사람의 노력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요컨대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여기부터는 내 주관적이고 사적인 대답이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적어본다. 우리에겐 어쨌든 하나의 답과 마침표는 필요하니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쓰고 싶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헤쳐나가는 법'과 '너무 쓰기 싫은 글을 아무쪼록 잘 쓸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질문에는 글이 끝을 맺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전부 나와 있다. '쓰고 싶을 것' 그리고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바로 그 조건들이다. 그렇다면 답은? 눈 밝은 독자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진즉에 눈치챘을 것이다. 우리가 하루의 마지막에 글 하나를 완성하고 싶다면 해답은 쓰고 싶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말은 쉽지. 그런 상황이 어디 쉽게 오겠는가. 우리는 일상 중에 아주 가끔 그런 시간에 머무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글쓰기 때문에 한숨을 쉬고 있다던가 하는 일 따위 말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과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무언가 말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데 그 순간에 글쓰기는 어떤 선결 과제가 된다. 그건 모든 글이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글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몫만큼이나 옆에서 열심히 글을 써야만 한다. 그건 우리가 열심히, 잘 사랑해야 하는 이유만큼이나 확실하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글을 잘 쓰기를 바란다면 스스로의 행실을 바르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간결하고 신선하며 진솔하게. 마치 사랑의 선행 조건처럼. 그러니 당신의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면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에게 당신을 생각하며 글을 써달라고 하자. 그 글은 당신을 생각하는 만큼의 글이 될 테고 그 글을 읽는다면 당신도 무언가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만큼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니까.

내 사람아, 이 글이 당신의 고민에 대한 답은 되지 않을지라도 내 고민의 답이 당신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이제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더라도 글을 잘 쓰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걸 안다. 밤을 새우고서라도 말이다. 그 순간을 당신에게 쓴다.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내 글쓰기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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