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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Feb 26. 2018

상실의 자리에 현명함이 깃들기를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를 잃어버리고 나서

상실 후에 찾아오는 정조(mood)는 사뭇 아름답다. 소설 <상실의 시대>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저릿하게 저며 오는 감각. 약간의 회한과 체념이 묻어나는 이 단어는 사람을 조금 더 현명하게 만든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설 명절을 앞두고 일상 용품을 담아두던 파우치를 잃어버렸다. 일주일 가량 카페 네 곳과 사무실 두 곳을 방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쯤 되면 보내줘야(?) 하나 싶지만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파우치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손바닥만 한 검정색 가죽 파우치였다. 그 안에는 잃어버려도 괜찮은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이 함께 들어있었는데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들)은 후자에 속했다. 차곡차곡 모아 왔던 메모리카드와 배터리를 일거에 잃어버렸다.

돌이켜보면 마음이 산만할 때마다 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시험 기간에는 매번 우산을 잃어버렸고 마감을 앞둔 날이면 예외 없이 충전기나 이어폰을 카페에 두고 왔다.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더 모자라게 만드는 비결이었다. 앉은자리 한번 되돌아보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나 보다.

어떤 일이 일어날 적이면 사전에 신호가 잇따른다고 한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신비한 이름을 가진 세상의 이치는 경각심을 요구한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을 잃을 때 조심하라고. 그러니 이번 일을 신호로 생각하려 한다.

주변에 무관심으로 무례해지는 것을 경계하려 한다. 주위에 축하할 일도, 위로할 일도 많았다. 스스로에게 매몰된 나머지 제대로 된 인사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한 다리 건너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솟는다.

상실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잃은 것 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내 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우산을 잃어버렸지만 이번 여름 내가 비를 맞지 않을 것과 같이, 메모리 카드와 배터리를 잃어버렸지만 카메라의 빈자리는 다시 채워질 것과 같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잃지 말아야지. 다른 것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지. 이런 문장을 조심스레 곱씹으며 밤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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