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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Mar 15. 2018

저도 코르크 마개가 되고 싶어요.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와서

올해는 기형도 사후 29주년이다.

기형도는 만 29살에 우리 곁을 떠났고 그가 남기고 간 시집은 출간 29주년을 맞이했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영원히 젊은 시인 기형도를 따라잡은 셈이다.

기형도문학관은 2017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경기도 광명시. 기형도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가 자란 곳에서 문학관을 지어 올렸다.

3월 10일은 기형도 29주년 추모 낭독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인간 기형도는 모르지만 시인 기형도를 좋아하는 나는 낭독회에 참석했다. 첫 방문이었다.

기차에 몸을 싣고 광명시에 도착했다. 대로를 따라 걷기를 10여 분, 기형도문학관이 그곳에 서있었다. 기형도문학관이라는 표지판을 바라보는데 하늘이 참 맑았다.

기형도문학관 3층 소강당, 기형도의 미완성 작품인 '내 인생의 중세'를 커튼처럼 두르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기형도의 시를 읽었다. 내가 아닌 이의 목소리로 듣는 기형도의 시는 낯설었고 그래서 좋았다.




얼마 전 친구가 나에게 오늘이 기형도의 기일이라며 기별을 주었다. 내가 주변에 기형도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많이 내고 다녔던가. 누군가에게 시인의 기일을 듣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길을 걷다 피식 웃었다.

더 정확하게는 기형도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의 시를 읽고서 늘 초조해하고 자신 없어하는 나를 다독일 수 있었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이불을 뒤채는 것보다 잠을 물리고 기형도의 시집을 뒤적이는 게 더 편안했다.

사는 일이 늘 버거웠던 나에게 그는 낙관은 무책임한 일이며 희망과 절망은 한 줄기에서 솟아난 이파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말에 나는 부족한 내 모습을 안심하며 잠에 들었다. 나는 그의 말을 먹고 겨우 자랐다.

늙지 않는 시인이 쓴 시로 누군가가 자랐다는 말이 우습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가, 그의 시가 없었더라면 나의 밤은 훨씬 더 길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는 내 삶을 조금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게 늘 고마웠다.




레이먼드 카버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를 존경한 카버는 급기야 안톤 체호프가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바로 <심부름>이라는 소설이다.

체호프의 임종 순간을 다루는 이 소설에서 체호프는 자리에 누워 샴페인 한 잔을 부탁한다. 친지들과 함께 인생의 마지막 잔을 즐긴 체호프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는 이 소설은 이름 없는 어느 벨보이가 바닥에 떨어진 코르크 마개를 조용히 거둬가며 끝을 맺는다.

카버가 늘 체호프를 존경해왔다는 점에서 이름 없는 벨보이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자신의 역할은 대문호가 남긴 샴페인 병마개를 닫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라고 불린 작가의 겸손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될 수만 있다면 안톤 체호프라는 샴페인 병의 마개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시인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직업이나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이라고.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곧 시인이라 말했다. 나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며 고민했다. 마음은 있지만 실력은 없는 사람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기형도문학관 앞에 서서 나는 시인도, 작가도 될 수 없겠지만 표지판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표지판은 화려하거나 거창할 필요가 없으므로. 표지판의 역할은 문학관이 거기에 서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장황한 미사여구나 아름다운 필체가 필요 없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내용만 지시하면 된다.

나는 내 글을 통해 사람들이 기형도의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 내 글을 읽고 기형도 시의 아름다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나는 내 글이 엉망이어도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표지판의 역할은 그런 것이므로, 나는 표지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기형도문학관이 있습니다.


2018년 3월 10일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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