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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Mar 25. 2018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

너 기자 할 거야? 라는 질문에 부치는 답

너 기자 할 거야? 


내 전공을 듣는 사람마다 나에게 묻는 질문이다. 대중매체에 대해 배우고 글쓰기를 배우고 영상을 찍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던 나날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자연스레 기자가 되는 줄 알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학교에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오래도록 공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좋든 싫든 서울엘 가야 하며 그런 시간들 뒤에도 기자가 될지 안 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나는 주위에 기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고? 그게 편했으니까. 내가 뭐가 될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말하는 것보다 기자가 될 거라고 둘러대는 편이 훨씬 편했으니까. 마치 명절 당일에 잘 차려입는 옷처럼 나에게 ‘기자’란 일종의 방편이었다. 


한 때는 정말로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저널리스트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약자를 돕고 권력에 저항하는 멋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더 놀라운 일은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도 있었고 그들이 만드는 뉴스를 보며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게 된다.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는 내가 되고 싶다던 직업으로부터 멀어졌다. 유야무야 졸업을 늦추며 갖은 활동과 교육에 참여했지만 실은 제도적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얻는 일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었다. 


써야 할 글을 쓰는 대신 쓰고 싶은 글을 썼고 뉴스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을 가다듬는 대신 자꾸만 뻗어보고 싶었다. 어느 제호, 어느 지면을 얻는 대신 개인의 이름을 딴 퍼블리싱에 열을 올린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기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접고 있었던 것 같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언론사 입사를 위한 준비 과정은 둘째 치고서라도 똑똑하고 유능하며 정의롭기까지 한 사람들과 경쟁할 생각을 할 때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 직업을 가진다 해도 행복해질 거라고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 되물을 수도 있겠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일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하는 거라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스스로도 숱하게 물은 질문이지만 역시나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겠다는 게 내 답이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도착한 곳이 쉴 새 없이 일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곳이라면. 과연 내가 그런 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는 더욱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가 단단하지 못하고 쉽게 지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일에 지치고 인간관계에 지치고 스스로에게 곧잘 지친다. 지치면 부러지게 돼있고 잘 부러지는 사람의 위험성은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사람의 그것과 같아서 나에게도 남에게도 늘 위험하다. 죽을 만큼 노력해서 모두에게 위험해질 필요는 없다는 걸 나 스스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뭐라도 남겠지. 얼마 전 친구와 주고받은 대화다. 정말 남을까? 그냥 하루 끝의 일기, 푸념, 하소연일 뿐인데. 그래도 남을 거야. 그러라고 쓰는 거잖아. 선문답 같은 이야기 끝에 나는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내가 쓴 글이 남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무언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보다 그냥, 처음처럼, 좋아서 쓰기로 했다. 꾸준히 책 읽고 영화도 챙겨보고, 이제는 연극 관람도 좀 차곡차곡 쌓아볼까 한다. 뭐라도 남겠지. 안 남으면 어쩌지? 그럼 그걸 책으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적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 보세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된다더니 제 인생은 아주 어그러져 버렸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책 같은 건 사지도 말고 눈에도 담지 마세요.” (이런 책은 필경 잘 팔리게 되어있다.)


예전에는 세상이 마냥 두려웠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과연 나 같은 게 쓸모가 있을까?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내가 세상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아니,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설마 나 같은 거 하나 쓸모없겠어? 하고 말이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 나름이 나에게는 좀 크게 작용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은 후로 글 욕심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독창적이거나 정확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감탄할만한 문장을 쓰면 그걸로 족했다. 아니 그래야만 만족했다. 남들이 쓸 수 없는 글을 쓰고 그걸로 인정받고 싶었다. 이를 테면 나는 글로 탑을 쌓고 싶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이라고 글로 인정받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 받고 싶었으면 싶었겠지. 그렇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다.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생각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을 생각을 글로 쓰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가 떠올렸던 생각을 글로 읽을 권리가 있으니까.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통해 전해 듣는 순간, 사람은 믿기 어려울 만큼 힘이 나니까.


나보다 훨씬 재능 있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다. 기획도, 창작도, 편집도 탁월하게 해내는 친구들, 후배들이었다.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좌절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그때마다 화 비슷한 것이 났다. 억울하고 내심 분했다. 그런 고민에 지쳐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좋은 기자, 좋은 에디터, 좋은 편집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저도 코르크 마개가 되고 싶어요.’ 얼마 전 광명시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와서 쓴 글의 제목이다. 존경하는 작가가 남기고 간 자리를 추스르는 역할을 맡고 싶다던, 또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저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기형도문학관의 표지판이 되고 싶다고 적었다. 여기서 기형도문학관이란 기형도와 그의 시, 그리고 문학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의 시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했으므로.


앞으로의 글에서 나는 또 한 번 표지판, 혹은 이정표가 되려 한다. 다만,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시인이 아니라 이제 일어서려고 하는 친구들과 후배들을 위한 표지판이 되고 싶다. 당신들은 할 수 있다고. 내가 알고 있는 곧고 아름다운 문장에 따르면 당신들은 빛나는 사람들이고 그걸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쓰려는 글들이 값싼 감상주의이나 센티멘털리즘에 기대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 흐를 가능성을 경계하고 힘도, 진정성도 없는 위로는 삼가려고 한다. 내가 문학에게서 배운 가르침이 있다면 그건 위로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로는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단호해야 한다. 쉽게 끊어지는 밧줄은 아무도 감정의 늪에서 구할 수 없고 한쪽 끝을 붙들고 있지 않은 밧줄은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뿐이다. 


나는 도망치고 있다. 이 글을 마치는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있을 곳이 굳이 천국일 필요는 없다. 악다구니 써가며 도착한 천국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나아지는 지옥이 낫다. 건강한 개인과 환대가 있는 지옥을 꿈꾸며,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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