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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Sep 01. 2018

그 손 짚는 곳이 무정하지 않기를

고마웠던 친구들에게 부치는 편지

출근 전 아침마다 짬을 내어 황현산 선생님의 <사소한 부탁>을 읽는다. 칼럼을 엮은 산문집이기에 한두 꼭지씩 나눠 읽기에 좋다. 선생님이 서문에 적으셨듯이 이국의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와 어떻게 공진(共振)할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름답고 곧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과거 선생님이 겪으셨던 기억과 에피소드에 기대고 있지만 그저 젊었던 시절의 복기나 정치적 견해의 진술에 그치지 않는다. 짧은 글 속에 읽고 쓰는 이의 예술론이 담겨있으며 무엇보다 언어와 문학에 대해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담겨있다.


제 사랑을 고백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듯이 말과 글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하나 있다. 그건 문학과 언어에 경도된 나머지 관습과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마는 것이다. 엘리트주의라고 해야 할까. 그런 사람들은 말과 글을 '훼손'하는 사람들을 자주 비판한다.


선생님의 글에 늘 감복하는 이유는 본인이 지닌 열정에도 불구하고 말과 글을 사람보다 앞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선생님은 사람이 말과 글을 훼손하는 일보다 말과 글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을 더 염려하셨다. 말과 글은 소통이 매개이자 그 자체로 아름다움의 결정이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세상의 한 조각이라고 보셨다.


문학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글을 공부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 보탤 말이 있다. 글쓰기 스터디를 간헐적으로 이어온 지 2년 정도가 됐다. 기한을 정해 글을 쓰고 서로 피드백을 해주고 다시 첨삭을 하고.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늘 열과 심으로 동참해준 친구들이 있어서다.


지난주, 스터디에 참여하던 친구들 여럿이 함께 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이제 곧 개강인데다 가진 능력만큼이나 바쁜 친구들이어서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대외활동을 하고 공모전에 나가고 자격증을 따고. 글쓰기는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취미에 가깝다. 부담으로 인해 다들 알게 모르게 마음을 앓았을 것이다.


친구들은 장문의 글을 통해 왜 스터디를 함께 할 수 없는지 나에게 설명하려 했다. 내게 이해를 구한다는 듯이.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염려가 아주 기우는 아니어서 나는 잠깐 스터디를 진행하는 일에 대해 허탈감을 느끼고 말았다. 모두가 이렇게 바쁘다면 굳이 글쓰기 스터디를 이어가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이 내 마음에서 솟아나고 만 것이다.


내 좁은 마음의 활약이었다. 아쉽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무어라 붙잡는 말을 하거나 성마르게 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문의 글을 보내준 친구들에게 해줄 말이 궁해 애먼 마음만 뒤적일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라든지 사정이라든지 결정이라든지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마음과 사정이 있는 법이고 그런 마음과 사정이 어딘가로 기울었을 때 결정과 결심이 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마음과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 내면의 오고 가는 것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는 일은 누군가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고 그거야말로 말과 글로 누군가를 억압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스터디로 인해 누군가가 내내 마음이 불편해 뒤척여야 한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었다.


내내 고민하다 그 친구들에게 잘 알겠으며 걱정할 것이 없다는 짤막한 답장들을 보냈다. 그럼에도 내 짧은 생각으로 부치지 못한 말과 해주고 싶은 말이 입안을 늘 맴돌았다. 고마움을 전하는 말이 쑥스럽고 쉬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고마움이 늘 미안함을 데리고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짧은 말을 하기 위해 길고 긴 말들을 데리고 왔다. 내 부족함과 미안함이 이 글보다 길고 고마움은 그보다 더 길다.


좋은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결심이 서는 일말이다. 결심은 마음이 기울어져야만 설 수 있는 것인데 마음이 기울어지면 사람은 자연스레 휘청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곧 어딘가에 손을 짚게 될 것이라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 손 짚는 곳이 무정하지 않기를, 기울어진 마음을 포근하게 받아줄 만큼 보드라운 곳이기를 바란다. 나도 멀리서 내 마음을 기울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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