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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Aug 23. 2018

태풍이 지나가고 나는 섬에 있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마음에 대하여

할머니는 손주가 고봉밥을 떠먹으면서 다리를 떨면 매섭게 꾸지람을 하곤 하셨다.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간다고, 옆 사람 정신 사납게 다리 떠는 거 아니라고. 할머니, 죄송해요. 저 사실 아직도 가끔 다리 떨어요. 

  

어머니는 티브이를 보던 아들이 손톱을 물어뜯을라 치면 따끔하게 혼을 내곤 하셨다. 그게 다 세균 덩어리라고, 자꾸 그러면 커서 못난이 손톱이 된다고 하셨다. 다행히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대는 버릇은 고쳤다. 손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다 피를 보는 버릇을 만들고 말았지만. 

  

그런데 왜 아무도 나에게 가장 나쁜 버릇은 스스로를 가여워하는 버릇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자꾸 그러면 커서 네 그림자가 너를 잡아먹고 말 거라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음을 터트리게 되고 종내는 물먹은 스펀지 같은 인간이 되고 말 거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여태껏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지옥 같던 폭염이 잠깐 누그러진 어느 날이었다.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교통편은 놓치기 일쑤였고 처리해야 될 행정 잡무는 자꾸만 내 손을 떠나려 했다. 업무 능률은 바닥이었고 스쳐 지나가는 말들은 크고 작은 상처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자동차 경적 소리에 그렇게 몸이 아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온 힘을 다해 차를 들이받는 게 덜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가 하셨듯, 엄마가 그랬듯 나도 스스로를 따끔하게 혼 내려했다. 스스로를 가여워해서는 안된다고. 방만해지는 마음은 입으로 물어뜯은 손톱만큼이나 못나게 자란다고.

  

그러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마음에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돌보지 않는 내 마음은 고아라고. 그제야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던 소외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돌보지 않는 내 마음은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없이 슬퍼졌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말과 글을 쏟아내고도 뜨거웠던 지난여름 내 마음 한 줄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스스로를 너무 괴롭게 내버려 뒀다. 버려진 마음은 가여웠고 이 짧은 한 줄 쓰지 못하는 내가 미웠고 기약도 기별도 없는 밤은 두려웠다. 지나간 여름이 지옥이었던 것이 폭염 때문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하늘에선 비가 올 것 같다. 아니, 이미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의 제목은 영화 제목과 노래 가사를 합친 것이다.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이고 다른 하나는 강아솔의 <섬>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이 자주 떠올랐다.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은 최근작 <어느 가족>이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은 마음이 혼자서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모습은 감독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외로움을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앓아야 하는 병이 있으니까. 그러나 신파와 청승에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로 잘 다듬어진 외로움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돌보지 못하는 저마다의 마음이 있는 걸까.' 어느 새벽녘 강아솔의 <섬>을 들은 이후로 잊지 못하는 가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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