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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Sep 20. 2018

누군가의 탈출을 슬퍼한다

최승자 시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노래'를 떠올리며

퓨마가 탈출했다. 늦은 오후 날아든 갑작스러운 안내 문자였다. 모두가 퇴근을 준비하거나 야근의 기운을 느낄 무렵이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내가 느낀 감정은 유쾌함이었다. 무탈하기로 소문난 동네에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내가 사는 지역 내에서 벌어진 일이되 퓨마가 내 원룸까지 달려오는 일은 내가 ‘정글북’의 모글리로 분하는 일만큼이나 요원해보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퓨마는 어느새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되어있었다. 포털의 인기검색어 절반을 차지하며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퓨마를 검색하던 사람들 중, 몇 명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퓨마의 안위를 걱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에 내가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퓨마의 탈출은 안온하던 일상의 일탈적 소식 정도로 생각되었다. 마취총으로 잡았다는 소식이 있었고 다시 놓쳤다는 애기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당연히’ 포획되어 자기 우리로 돌아가겠거니 생각했다.(물론, 그건 그거대로 슬플 뿐이라는 생각이 든 건 나중의 일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책을 읽다가 눈을 잠깐 쉬었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휴대폰 진동을 느끼고 화면을 열어보니 퓨마의 사살 소식이 날아와 있었다. 탈출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고 조용하게. 거기에는 ‘금일 대전 동물원에서 탈출한 퓨마1마리를 21:44분에 사살 상황종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퓨마 한 마리’가 아니라 ‘퓨마1마리’라고 쓰는 행정상의 고집에 눈이 한번 가닿았고 ‘사살 상황종료되었음’에서 사살과 상황종료 사이에 무엇인가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두어 번 하다가 허전한 마음으로 눈을 뗐다.


그간 퓨마가 지내왔던 좁은 우리의 실태나 당국, 해당 시설을 비롯한 인간들의 안일함과 미흡했던 대처를 지적하는 기사를 읽은 게 오늘 아침이었다. 기사나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퓨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가둬두었으면서 책임도 다하지 못하는 그 방임이 애초의 감금만큼이나 질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임이나 방종 같은 단어를 떠올렸을 때였다. 최승자의 시를 떠올린 건 말이다. ‘떠날까요’로 시작하는 시다.


떠날까요/떠날까요/바람은 묻는데//그 여자는/창가에서 울고 있었다// 떠날까요/떠날까요/파도는 묻는데//그 여자는 천천히/허공에 눕고 있었다//파도치는 바람/한 자락으로 눕고 있었다//(허공에 그녀를 방임해/놓은 사랑의 저 무서운 손)


최승자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노래」, 『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최승자의 다른 시들이 그렇듯 사랑 이후를 응시하고 있는 시다. 이 시는 최승자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자산인데 특히 저 괄호 속의 문장이 그렇다. ‘허공에 그녀를 방임해 놓은 사랑의 저 무서운 손.’ 이 짧은 문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심상이나 감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최승자가 말하는 세계는 사랑을 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식의 사람이 주체고 사랑이 대상인 곳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세계는, 이를 테면 이런 곳이다. 우리는 세계의 우리에 갇혀 있고 우리를 양육하는 태만하고 무정한 주인이 있는데 그 주인은 우리에게 간헐적으로 모이를 준다. 최승자는 그 주인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우리는 늘 사랑에 방임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랑이 모자란 걸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이 시를 읽은 뒤로 나는 차가운 우리가 느껴질 때마다 몸을 떨었는데 거기에는 슬픔과 분노와 일말의 간절함이 있었다. 나는 그 간절함에 따라 읽고 써왔는데 그게 일종의 탈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누군가의 실패를 한낮의 해프닝으로 넘기기 어렵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은 생명의 디폴트값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생명은 삶을 잃었고 이 시점에서 한가하게 감상을 늘어놓는 게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평소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할 따름이다. 슬프되 슬픔을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다. 나에게는 퓨마를 애도할 언어가 없다.


언어는 빈곤한데 슬픔은 풍성해서 나는 퓨마를 위해 내 슬픔의 일부를 조금 떼어두기로 했다. 방임된 이들이 책임과 관심과 다정함을 바라는 간절함과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생명의 존엄함이 뭉개진 현실을 슬퍼하는 마음의 결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 간절함만큼 퓨마의 안식을 빈다.(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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