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랜 친구 흰눈이가 떠났다
흰눈이가 떠난지 일주일 지났다.
지난 일주일은 내게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 중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남은 시간을 모두 간호하며 보냈다. 아픈 흰눈이를 보면서 해줄 수 있는 건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 뿐이었다. 밤낮으로 목놓아 울며 낑낑 앓는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흰눈이 역시 이 아픔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몇일 뒤, 일요일 저녁 가족 품에서 천천히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우리 곁을 떠났다.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인위적인 이별 방법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흰눈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로 했다. 뭐가 옳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매 순간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19년을 함께했지만 떠나는 건 순간이었다.
군입대하면서 제대까지만 건강하게 해달라고, 산티아고로 떠나면서 다녀온 뒤 건강하게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럴때마다 흰눈이는 내 바램대로 밝은 모습으로 반겨줬다. 하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몸의 기능이 점점 둔해지는 희눈이를 보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간식을 주며 '여기 있는 건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문득 슬퍼지곤 했다.
작년 12월, 큰 발작을 일으킨 고비를 넘기고 우리는 6개월을 함께 했다. 마치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는 듯 삶의 의지를 보여줬다. 매일매일 약도 잘 먹었고, 거실에 있으면 졸졸 따라와 옆에 앉곤했다. 가족들이 모여있는 주말에는 가족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덕분에 조금은 덜 슬프게, 좀 더 밝은 모습으로 보낼 수 있었다.
떠나고 난 뒤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은 청소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집안 어디든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퇴근 후 돌아오면 흰눈이 생각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그와 함께한 19년의 시간이 내 마음속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몫이 남은 것 같다. 그가 담담하게 고통을 감내했던 것 처럼 나도 이 슬픔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이겨내보려 한다.
반려견을 키우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또 주변에 자신의 공허와 결핍을 채우기위해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함께할 자신이 있는지 질문해주길 바란다. 어쩌면 이별의 아픔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흰눈이와 함께할 당시 초등학생인 나는 너무 어렸고, 단순히 귀여운 동물 친구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이런 슬픔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막연하지만 이별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마지막 가는 길에 희눈이 앞에서 엉엉 울지 않고 지금보다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멋진 삶을 살다간 흰눈이, 이제 나도 너무 슬퍼하지 않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