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금산여관
방학에 뭐할 거야?
학기가 끝나기 무섭게 받는 질문이다. 일상적인 인사 같은 질문. 이번 방학 계획은 단순했다. 휴식이었다. 제대 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일까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는 나를 발견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그냥 쉰다고 하니 나태해 보이고, 정신 못차린 것 같고 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공부하면서 돈도 벌려고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단순히 쉬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사진과 함께 친구가 추천해준 금산여관. 여관을 자주 접한 세대가 아니기에 '여관'이라는 단어는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번 방학에 이곳에 가서 쉬다 와야겠다 하고 다짐했다.
이번 여행은 기존의 여행과 달랐다. 무엇을 보고, 사고, 먹기 위한 여행이 아닌 그저 쉬기 위함이었다. 여행보다는 '휴양'이었다. 순창에 간 것이 아니라 금산여관을 갔기에 가능하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1인실을 예약했다. 그곳은 철저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이제는 갈 수 없는 할머니 시골집에 놀러 간 기분이었다. 오래된 문지방과 수평이 맞지 않는 문 그리고 기와집을 마주하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여행지에서의 첫날 밤은 설렌다. 광목이불을 덮고 뜨거운? 방바닥에서 몸을 녹이고 일찍 잠이 들기 위해 누웠다. 차가운 윗 공기와 할머니 집의 뜨거운 아랫목이 떠오르는 온기로 내 몸은 잠들기 적절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무세요? 차 한잔 하시려면 본채로 오세요"
본채는 간단한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미 그곳에는 몇 명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행의 즐거움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전에는 서로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사람들이 만나서 성별, 나이를 떠나서 여행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폭넓은 주제로 이야기는 흘러가고 여행, 취미, 사진 소소한 일상과 같은 개인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시간이 소중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게스트는 나 포함 2명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인장의 지인들이었다. 두부 장인, 트레킹 장인, 술 장인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폭넓은 주제로 이야기는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인장이 내일 변산으로 여행을 가신다고 하셨다. 티켓이 생겼는데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내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셨다. 잠자리에 누어서 생각해 보니 황당함이 밀려왔다. 게스트하우스에 게스트만 남아있는 경험은 처음이기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집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을을 주는 것인지. 실제로 다음날은 금산여관의 주인인 마냥 지냈다.
금산여관에 있는 소품들은 대부분이 이곳에 머물고 간 여행자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다. 이러한 작은 소품들이 모여서 금산여관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작은 소품들부터 시작하여 실내의 장식적 요소들도 모두 여행자가 가져다준 것이라 했다. 날이 풀리면 마당에 꽃이 만개한다고 한다. 플로리스트 여행자가 와서 직접 심어주고 간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 오면 나도 나의 애장품 하나를 들고 와야겠다. 이곳에 나의 존재감을 남길 수 있도록.
77년이나 된 건물이라 하면,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 이곳이 여든 살이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까. 심지어 이곳은 여관이었다.
103호에 머물렀는데 그곳에 있는 거울은 4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거울이라고 한다. 주인장이 게스트하우스로 명칭만 바꾸었을 뿐 기존의 여관을 역할을 하고 있다. 여행객이 와서 쉬다 가고 하룻밤 이상을 보낸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맥락 속에 있다. 금산여관이 일흔일곱 살이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다 갔을까. 매력적인 점은 이곳은 현재까지도 여행자나 잘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손때 묻은 물건과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방에서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했던 티비는 이제 마당으로 나와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때로는 긴 설명보다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것이 그곳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티비를 보면서 금산여관의 세월을 유추할 수 있었다.
주인장의 성격과 풍기는 분위기 때문일까 금산여관은 조금 특별하다. 개인적으로 얼굴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선명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공간에도 어떤 사람이 머물고 관리하는 지에 따라서 그곳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금산여관은 차분하고 따스하다. 금산여관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금산여관을 오고 간 사람들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두고 갔는지가 느껴진다. 그것은 주인장님이 일일이 설명한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다. 나와 같은 나이의 딸이 서울에 있다는 주인장님. 사람이 좋아서 이일을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즐겁다고 했다. 그는 여행객을 맞이하면서 걸어서 하는 여행이 아닌 앉아서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해두고 싶어했다. 주인장은 이곳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직접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잘되는 게스트하우스는 모두 비슷하다. 친철한 주인과 편안한 잠자리, 세심한 배려와 함께 안락한 공간. 그럼에도 금산여관이 차이를 만드는 차이는 주인장이 아닐까. 주인장만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소통'이 사람들이 이곳을 애정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여행 한 번으로 내 일상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여행 후 인생이 달라졌어요"와 같은 표백하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여행이 주는 일상의 소중함은 안다. 그리고 그것이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다. 이미 지나간 것들은 시간과 함께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금산여관을 다녀온 후, 시간이 흐른 이 시점에서 나의 기억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추운 화장실, 수평이 맞지 않아 문을 닫으려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 난로를 틀지 않으면 추운 방 분명 불편한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느낀 따뜻함과 여유의 경험은 소중하다. 금산여관은 심심한 곳이다. 그 흔한 티비도 없는 게스트하우스이다. 오로지 그곳을 가득 채우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여행객을 품어주는 주인장과 함께.
다음에 또 올 것 같아요
가는 길에 마지막 인사로 주인장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올 것 같다고, 부모님과 혹은 친구와 함께 오겠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곳을 추천해주고 싶다. 내가 그곳에서 느낀 감정들을 그들도 느끼기를 바란다. 이곳의 주인장은 여행객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실제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름과 함께 건넨 인사 한마디로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개인적으로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면 조용히 머물다 오는 성격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일부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시골집에 놀러 가는 어린아이처럼 편한 마음으로, 때로는 철부지 같은 여행자들이 많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