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발하는마케터 Jun 13. 2018

결국 대화는 말하기보다 듣기

이해를 바탕으로

"이해는 가장 잘한 오해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완전한 이해는 없고, 그 누구도 타인의 생각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내 경험치와 지식 안에서 재해석된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흔히 일상에서 쓰는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혹은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라는 문장은 모두 틀린 문장이 된다. 오해는 항상 수반되는 것이기에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의 서두나 결미에 이러한 말을 하는 덧붙이는 이유는 일상에서 오해는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은 말이지만, 이 문장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대화 도중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네 말 전부 이해해"와 같은 말에 대해서 항상 의문이 따라왔는데 이러한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즉 우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오해를 이해라고 받아들이고 암묵적으로 서로가 합의한다. 최종적으로 이해는 수용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한 개인이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화만큼 좋은 수단이 없어 보인다. 글은 직설적이면서 정돈된 어투로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기 어렵다. 또한 감정을 담아내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대화는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허락하는 하에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내 의견을 다른 말로 여러 번 표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물론 대화를 하는 각 개인들이 합의점에 도달하고 싶은 의지를 전제로 한다. 결국 이해에 가깝게 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대화가 효율적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토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회사에는 미팅이라는 것이 있다. 결국 모든 합의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말하기보다 듣기


 대화라는 추상적 개념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상황이 그려진다. 차분히 상대방에 말에 집중하고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 쉽지 않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은 서로 다른 개인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선행되어야 한다. 듣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대화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좋아하는 대상은 경청을 기반으로 비교적 상대방에 말에 호응을 잘 해주거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경청과 호응이 어떠한 의도적인 목적을 갖고,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행해질 경우 아부, 아첨이라는 말로 퇴색되기도 한다. 하지만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가정 하에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피드백은 진심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즉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그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말을 자른다거나, 다 듣지 않고 상대방의 생각을 예단해 자신의 경험치에 맞춰 해석하고 충고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꼰대"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과는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끝까지 말을 들어주고, 내 말에 집중해주는 사람과는 보다 깊은 대화를 원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말하는 사람도 상대방에 생각과 의견에 대해 듣는 자세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결국 대화에 기반한 가장 잘 된 오해, 즉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말하기보다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대화에서는 말하기보다 듣기다.



작가의 이전글 일흔일곱 살의 한옥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