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패스 여섯 번째, 영국 중(장)년 배우들의 스페인 여행 엿보기.
★★★
# 트립 투 잉글랜드, 트립 투 이탈리아에 이은 두 영국 배우의 세 번째 여행.
# 스토리와 영상은 거들뿐, 두 익살꾼의 쉴 새 없는 수다 관전이 포인트.
* 영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으나, 관람에 지장을 초래할 언급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50대 영국 남성 둘의 쉴 새 없는 대화가 영화를 이끈다. 스페인, 그중에서도 비교적 덜 화려한 산탄데르와 그라나다 등의 배경은 반드시 그곳이 아니었어도 영화적으로 무리가 없었을 '무대' 정도로 여겨진다.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을 잘 아는 사람이면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 이 영화는 파격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더 트립' 영화 시리즈의 전작 두 편(트립 투 잉글랜드, 이탈리아)에 대한 정보가 없던 나로서는 포스터만 보고 '뻔한' 식도락 여행을 예상했다가 영화 초반부터 완전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007과 로저 무어,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 믹 재거와 데이빗 보위, 마이클 케인과 이안 맥켈런을 알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성대모사, 풍자가 영화의 상당 시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언급과 비유가 난무하지만 지극히 영국적인 문화의 장에서 펼쳐지는 언어유희를 나는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 더는 기억도 안 난다.
그 말인즉슨, 이 영화는 두 영국 배우의 실제 삶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각색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일종의 다큐식 로드무비랄까. '여행'이라는 형식 안에서 두 주인공이 펼치는 조화와 부조화야말로 영화의 절묘한 서사를 완성시킨다. 그중의 '조화'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둘의 언어유희와 유머다. 신들린 듯 성대모사를 주고받는 스티브와 롭의 모습은 따라하는 대상이 누군지 몰라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
굳이 부조화라고 언급한 두 번째는 각기 다른 두 배우의 삶이다. 나는 <트립 투 스페인>을 본 뒤 <트립 투 잉글랜드>를 찾아봤고 영화 관련 기사도 나름대로 읽었으나, 영화에서 그려내는 둘의 가정사라든지 인생이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때문에 그저 한 편의 영화에 드러난 둘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때 보여지는 스티브와 롭의 삶은 철저하리만큼 차이가 있다. 배우이자 각본가로서의 커리어를 고심하며 나이 차가 큰 애인과의 애정 문제로도 갈등하는 스티브. 그의 고독은 일주일의 여정을 지나며 오히려 심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이 외부로의 환기와 동시에 여행자의 내면을 철저하게 드러내 준다는 명제가 떠오르는 이유다.
롭은 다르다. 뒤늦게 태어난(?)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아빠이자 여행 내내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는 가정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심지어 야밤에 아내와의 통화에서 폰섹스를 말하는 투정조차 귀여울 지경이니, 그의 익살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커리어, 배우로서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스티브와 달리 롭에게서는 별다른 불안이 엿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롭의 안정감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스티브와의 동행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느껴진다.(반대로 스티브의 불안정성은 롭을 통해 두드러지는 것일지도)
일주일의 여행 후 집으로 귀환하는 롭의 가벼운 발걸음은 영화 후반부에도 여전히 여행 중인 스티브의 처지(?)에 이르러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는 국내 예능프로 '미우새'의 엄마들이 아들의 결혼을 그토록 염원하는 게 비단 한국적 정서만은 아니란 점을 '남자가 그래도 가정을 꾸려야지'라는 시각으로 일견 드러낼 뿐, 강요하거나 가르치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내가 만약 50대 미혼남, 혹은 이혼남이었어도 그랬을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스티브와 롭을 지켜보며 가장 크게 느꼈던 점 하나를 짚어 보고자 한다. 그건 바로
앞서 언급한 '조화'의 영역 안에서 스티브와 롭은 제 3자에 대한 농담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조롱하며 언어유희를 즐긴다. 정해진 시나리오 내에서의 설정임을 감안하더라도 둘 중 어느 한 명이 밀리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고 밀고 당기기를 절묘하게 해내는 것이다.
스티브가 자신의 아들 조에게서 황당한 선고를 받은 상황에서도 둘의 유머가 끊이지 않는 부분에서 나는 확실히 감탄했다. 스무 살 아들 녀석이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는 스티브의 푸념에 롭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되받아친다. 그럼 이제 너는 할아버지가 아니냐고 말이다. 이를 들은 스티브 역시 잠시 롭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 상황에서도 너는 왜 그러냐' 따위의 정색이나 심각함은 이 영화에 없다.
이렇듯 상대의 농담을 받아넘길 줄 아는 태도는 연륜으로만 가능한 걸까. 과연 내가 50대에 이르러 이들처럼 친구의 조롱을 유쾌하게 받아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요새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래저래 각박해진 탓인지 친구가 조금만 삐딱한 농담을 하거나 빈정거리면 예전보다 쉽게 마음이 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은 듣는 사람보다는 하는 사람의 태도와 스킬에 달려있다는 생각이긴 하나, 어쨌든 듣는 이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그럴싸한 해학과 풍자라 한들 먹히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내가 보기에 롭과 스티브의 태도는 그들의 문화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성공한 중년 남성의 경제적 안정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판단이다. A급 스타라고까지는 못하겠으나 어쨌든 둘은 꽤나 성공한 '셀럽'이지 않은가.
아무튼 종합하자면 나는, <트립 투 스페인>을 보며 이들의 여행이 내내 부러웠다. 근 이십 년 후에 마음 맞는 친구와 쉴 새 없이 떠들며 세계의 맛집을 다닐 수 있을까. 이를 꿈꿔보는 건 과연 영화적 상상일는지, 현실적 이상일는지. 지금 곁에 있는 친구놈들과 유쾌한 대화를 되도록 많이 나누는 게 우선이려나. 괜찮은 성대모사 몇 개쯤 연마해 놓는 건 덤일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