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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거나, 쌉싸름한 사랑 케이크.

무비패스 일곱 번째, 의외의 발견 <케이크 메이커>

by 차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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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생일에나 챙겨 먹던 게 케이크였다.


그러나 이 달콤한 디저트는 어느새 가장 익숙하고도 친근한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화려하고 다양한 케이크들이 각종 베이커리의 진열장을 수놓고 있다. 커피 하나와 차 몇 종류가 전부였던 다방이 각종 스페셜티 커피와 음료들로 넘쳐나는 카페로 바뀌어 온 것만큼이나 현격한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해 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케이크를 닮았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사랑은 나름대로 진지했지만 무척이나 단순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좋아한다는 사실, 사랑 하면 오직 떠오르는 단 한 사람. 케이크 하면 으레 생일이 떠올랐듯 그 시절의 사랑이란 그처럼 간단명료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여러 케이크들의 등장만큼이나 사랑의 종류도, 심지어 대상까지도 다양해졌다. 모든 것이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이 모든 것인 마냥 열정을 쏟으며 누구나 다양한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이에 사랑과 사람들이 시대마저 변화시킴으로써 오늘날 많은 이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거나 갈구하는 세상이다. 여기에는 동성애와 같이 과거에는 터부시 되었으나 점차 그 권리를 확보해 가는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도 포함된다.




cakemaker_3.jpg 압구정 CGV 앞의 큰 포스터가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영화 <케이크 메이커>를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감상했다.


다소 거칠게 분류하자면, 소위 주류 영화들은 각종 마케팅과 홍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강이라도 알고 보는 반면 비주류 영화들은 어떠한 검색이나 호기심도 없이 일단 보기 시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깜짝 놀랐다. 출장 차 방문한 제과점에서 아내에게 줄 케이크를 고르던 이스라엘 사내가 그걸 만든 독일인 제빵사와 다짜고짜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콤한 포레스트 케이크를 자신있게 내놓은 이 제빵사 역시, 건장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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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흔적을 찾아 이국 땅으로 향한 파티쉐 ‘토마스’
사랑을 잃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카페 여주인 ‘아나트’
사랑을 떠나기로 결심한 케이크 애호가 ‘오렌’

- daum 영화 소개 페이지


어쨌거나 영화 포스터와 소개 문구 정도는 보고 들어갔기에 사랑의 흔적을 찾거나 사랑을 잃은 사람, 사랑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이성'으로서 엮이는 단순한 사랑만을 나는 예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의 도입부터 두 사내가 야릇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뒤섞이는 장면을 보니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단언컨대 결코 '소수'를 위한 영화가 아니다. 소수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더더욱 아니라고 확신한다. <케이크 메이커>는 누구나 사랑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고 음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영화다.




낯선 유럽인 배우가 주연이고 흔치 않게 예루살렘이 주 배경인 이 영화는 충분히 이색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다루고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까지 낯설지는 않다. 주인공들의 호흡과 표정을 천천히 살필 수 있는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익숙할 롱테이크 필름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전공하지 않아서 숏테이크와 롱테이크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을 지그시 응시한 채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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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토마스와 아나트가 부엌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영화의 중후반부이다.


그 전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갑작스레 사랑을 잃은 토마스가 사랑했던 이의 흔적을 찾아 그의 아내였던 아나트의 가게에서 일하게 되며 이야기는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한다. 아나트의 입장에서 토마스는 죽은 남편의 불륜 대상이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숨긴 토마스에게서는 어떤 악의나 목적성보다는 순수하고 맹목적인 그리움, 혹은 절박함이 엿보인다. 때문에 아나트는 토마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여기에는 탁월한 제빵 솜씨로 만들어 내는 달달한 케이크, 쿠키라는 매개가 존재한다.


결국 그녀가 마음을 활짝 열게 되는 건 토마스가 열정적으로 케이크를 만드는 순간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케이크는 비록 과정에서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할지언정 결과물은 어떠한 음식보다 달콤한 디저트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고독과 쓸쓸함도 결국에는 반죽되어 살아남은 자신의 행복한 삶으로 빚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나트는 토마스의 케이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그 어떠한 키스신이나 베드신보다도 오묘하고 격정적인 둘의 뒤엉킴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들의 호흡은 비록 거칠지만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야릇하지만 결코 자극적이지 않은 이 장면에서 토마스와 아나트는 비로소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이를 지켜본 나는 둘 모두에게 어떤 연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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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 케이크. 이처럼 달달한 요소들의 조합도 흔치 않을 테다.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인기였던 이 영화를 따라 전주의 어느 카페에서는 영화에 등장한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를 내놓아 화제가 됐다고 하니, 케이크의 달콤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영화에 공감한 이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사족. 흔히 달달한 케이크는 여성들이 더 좋아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적어도 나와 내 여자 친구의 경우에는 반대다. 카페에 가서도 여자 친구는 케이크나 쿠키 같은 건 좀처럼 찾지 않는데 나는 내심 아쉬워 할 때가 많다. 맵거나 짠 음식을 먹은 후라면 더더욱 달달한 케이크가 당기는데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입맛을 성별로 일반화할 수만은 없는 듯하며, 사랑 또한 그러하리라 여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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