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2박 3일 여행기 첫 번째
퇴사하기 전, 나는 도 단위의 여행 사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라 전주 출장이 잦았다. 일주일에도 며칠 씩이나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또 많은 것들로 고민했다. 그런 내가 퇴사 후에 전주에 들를 리가 만무했다. 한옥마을 구경을 할 일이라도 생기면 모를까, 그도 아니라면 도무지 일부러 전북 전주까지 내려갈 이유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한옥마을마저도 내게는 더 이상의 매력이 없었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한복을 빌려 입은 어린 친구들과 부대끼며 거리 음식을 먹는 건 2년 전 여자 친구와의 여행을 마지막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얼마 전이었다. 여전히 전주에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윤 형에게 카톡을 했다. 가끔 안부를 물을 때마다 전주에 내려오라던 형은 그날도 어김없었다. 난 그냥 오랜만에 고속터미널 역에서 저녁이나 함께할까 하고 물어본 거였는데, 형은 다짜고짜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했다. 이번에야말로 같이 한 번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당시에는 본부장으로 불렀으나 이제 더는 직급이 필요 없게 되었으니 형이라고 부른다. 형과의 에피소드는 매우 많지만 일일이는커녕 몇 가지도 제대로 소개할 수는 없다. 마치 중고딩 친구들끼리 서로의 허물없는 모습을 다 알듯 둘이 합쳐서 고희(古稀)가 다 된 우리지만 직장 동료를 넘어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지는 오래이기 때문이다. 윤 형은 종종 나의 발가벗은 사진(절대 오해 마시길. 숙소에서 샤워하고 나오다가 찍혀버렸다)이라든지 trash 같은 대화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지만, 여태껏 실제로 그리한 적은 없다. 어느 한쪽이 시작하면 다른 쪽도 반드시 죽을 게 뻔함을 그도 알기 때문이리라.
2시간 반 남짓 우등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익숙했다. 저녁이 다 돼서야 숙소 겸 사무실로 쓰이는 오피스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짐만 놓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왔다. 일본식 화로구이 주점에서 고기와 짬뽕탕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주먹고기밥도 먹었다. 늘 그렇듯 '우리 석작가 맛있는 거 먹여야지~' 라면서 형이 사줬다. 나도 양심껏 보답을 하느라 하는 편이지만 여전히 형에게 빚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가끔 내가 형에게 욕먹는 걸 생각하면 우리가 또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둘 다 영화 보는 걸 꽤 좋아한다. <독전>을 아직 못 본 상태라 아쉬웠는데 마침 형도 안 봤다길래 신나서 예매했다. 새로 오픈한 CGV 서전주 지점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하루 두 번뿐인 영화의 두 번째 상영 시각이 마침 30분 후였다. 어쩜 그리도 딱딱 맞던지. 영화는 내가 쐈다. 한산한 영화관 내부는 깔끔하면서 휑했다. 잠시 드러누운 형의 모습을 찍어뒀다. 권모와 술수, 배신이 난무하는 독전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특히 그렇다. 내가 약점을 안 잡힐 자신이 없으면 상대의 약점을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붙잡아야만 한다. 위의 사진 정도면 뭐 애교 수준이니까, 저렇게 한가로운 새 영화관에서 재밌는 영화를 함께 봤음을 난 그저 자랑하고 싶을 뿐이다.
다음 날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그다지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형은 예정된 일을 하느라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고, 나 역시 그에 맞춰 오피스 공간에서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내가 일했을 때보다 확장된 사무실을 방문한 김에 예전에 맡았던 프로젝트를 뒤이어 하고 있는 직원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류 뭉치들 중에는 나의 필체도 보였다.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들도 있었고, 결국에는 바뀐 것들도 많은 어수선한 현장이었다.
개인은 개인의 선택을 하는 것이고, 회사는 회사의 선택을 하는 것이므로 연인끼리의 합의적 이별과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남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좋은'이별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좋으면 계속 만나는 거지, 이별한다는 건 분명 일방적으로든 양쪽 모두든 서로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리 쿨하지 못한 편인 나로서는 예전 출장지의 업무 현장을 돌아보며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퇴사자는 되도록 이전 직장을 돌이키거나 찾아갈 필요가 없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조직이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 나의 부재가 조직으로서는 그저 톱니 하나의 교체였음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그런 말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이왕이면 내가 어마어마한 톱니였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전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라든지 안부 따위의 위선으로 포장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펼쳐 나가면서 진심으로 전 직장의 건승을 기원하는 일이야말로 개인이 '너 없이도 회사는 잘 굴러간다'는 명제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작 매주 전주를 찾는 윤 형조차도 한옥마을을 따로 방문하는 건 몇 개월 만이라고 했다. 하긴, 나도 한창 일할 무렵에는 여행지에서의 여행을 그리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가깝고도 먼 전주 한옥마을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풍남문으로 향했다. 역시나 사방이 탁 트인 전주 하늘의 해질 무렵은 아름다웠다.
잘 아는 식당인 '교동 석갈비'에서 비빔밥과 석갈비를 먹었다. 너무너무 푸짐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였다. 이번에도 형이 한 턱을 쐈다. 남은 고기 한 점을 끝까지 꾸역꾸역 먹는 나를 보며 윤 형은 '잘도 (얻어)먹는구만~' 이라고 입꼬리를 씰룩씰룩했다. 전혀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래서 내가 그다지 일방적으로 빚지는 게 아니라는 확인을 다시 할 수 있었다. 형 사랑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