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퇴사자의 옛 출장길 여행 : 전주 편 #2

여행은 여행이었던 전주에서의 2박 3일 두 번째

by 차돌


IMG_5615.JPG


밥을 든든하게 먹고 식당을 나왔다. 아까 전의 풍남문도 풍남문이었지만 역시 한옥마을의 지붕 너머로 노을 섞인 전주의 하늘이 따스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던 오후 무렵이었다.


IMG_5599.JPG


일반적인 전주 여행객이었다면 경기전에 들어간다거나 전동성당을 구경했겠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전의 에피소드를 함께 얘기하며 한옥마을의 명소들을 그저 무심히 지나쳐 걸었다. 이제는 한 번쯤 안 다녀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주 한옥마을은 유명하고 흔한 여행지이므로 많은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첫 여행지로서의 설렘보다는 익숙한 장소로서의 기억이 반가움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분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일' 때문에 수도 없이 골목들을 오갔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저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부른 배를 꺼트릴 목적으로 전망 좋은 카페 '전망'을 찾아갔다.




IMG_5603.JPG


우연찮게 한옥마을 초창기의 지원 사업이니 하는 정보들을 예전에 주워 들었던 우리는 지극히 세속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10년 전에는 평 당 얼마였는데 지금은 얼마가 됐느니 하는 따위의 그런 말들이었다. 탁 트인 좋은 전망을 눈 앞에 두고 너무 팍팍한 게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리 테이블 옆에서 자기들 사업 얘기로 한창이던 아저씨들에 비한다면야 우리의 비현실적인 대화는 그래도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기왓장 하나도 못 가졌으면서 만약에 저 한옥이 내 것이었다면 어쩌고 하며 떠들던 우리 얘기를 누가 들었으면 어땠을까.


또 다른 옆 테이블에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커플이 사이좋게 셀카 삼매경에 빠져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풋풋한 그 모습에 나도 잠시 망상을 멈추고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경치를 즐겼다. 그러나 형과 나는 이내... "쟤네들 이 시간에 여행 중인 거면 당일치기는 아니겠지?" 라며 커플 입장에서의 전주 여행이 지닌 지리적 이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과연 이 남자들의 사고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IMG_5614.JPG


마음이 삐뚤어서가 아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각도 그대로 한 번 삐뚜름하게 바라본 한옥들의 모습이다. 전통 양식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옛 기와집들의 구조가 정말 이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망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의 모습은 꽤 특색 있는 여행 컨텐츠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size_IMG_5606.JPG


테라스에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관광지의 저녁답게 일찍이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주위가 차분해진 한옥마을이었다.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윤 형이 말했다. 낮의 활기찬 전주 한옥마을보다 오히려 이렇게 어둠이 깔린 고요한 느낌이 좋다고. 모처럼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그 말에 동조하며 형을 한 번 쳐다봤다. 어김없이 입가를 씰룩이던 형은 뭔가 강렬한 몇 마디로 나를 놀리는 말을 했다. 지지 않고 나도 맞받아서 농을 하며 서로 킬킬댔다. 역시 남자들은 둘이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가 훨씬 정상적인 법이다.


IMG_5608.JPG
IMG_5609.JPG
대충 이런 분위기의 넓은 찜질방인데 서울보다 가격은 저렴하다.


더는 한옥마을에서 할 게 없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형이 찜질방에 가자고 했다. 요새 업무가 힘들단 얘기를 장난 섞어서 자주 했는데 확실히 형이 피로가 쌓였나 보다 싶었다. 나도 잘 아는 사우나&찜질방이 하나 있었다. 스파라쿠아라는 곳인데 서울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시설도 무척 좋아서 예전에 고된 일이 끝나면 가끔 찾던 장소였다. 개인적으로 전주에서 1박 여행을 할 경우 굳이 비싸고 좁은 한옥 스테이에 집착하느니 하루 정도는 이곳 찜질방을 이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IMG_5617.JPG 찜질방도 내 집처럼.


여기서도 우리는 꽤 한참을 드러누워서 실없는 소리도 하고 몸도 지지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별로 일이랄 만한 걸 하지 않은 나로서는 고된 업무 끝에 피로를 풀러 온 게 아니라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윤 형은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찜질방에서의 휴식에 나보다 더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런 찜질방을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하나 지으면 어떨까' 라는 망상에 대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문득 근래에 봤던 영화, '트립 투 스페인' 이 떠올랐다(https://brunch.co.kr/@hyuksnote/102). 남자 둘이서 여행을 하며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받는 포맷이 딱 우리와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비록 영화에서는 스페인 이곳저곳을 돌며 영국 문화 전반의 이야깃거리를 풀어낸 데 반해 우리는 기껏(?) 전주 어귀에서 이런저런 잡설을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트립 투 전주' 도 썩 흥미로운 소재이자 서사가 될 것 같기는 하다.




IMG_5621_Moment.jpg
IMG_5622.JPG


찜질방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갈 만한 거리였다.

사우나를 하고 난 뒤라 더 상쾌한 기분으로 밤의 전주를 산책했다. 꽤 큰 하천 지류인 삼천을 가로지르는 효자다리를 건너며 둘러본 야경이 좋았다. 한강의 그것보다는 규모가 작긴 했지만 오히려 밤공기는 서울보다 나은 듯했다.


환한 달빛 아래 어느덧 전주에서 이틀이나 보낸 게 실감 나지 않는 밤이었다. 오전만 해도 전 직장의 사무실을 보며 퇴사 이전의 기억들로 머리가 살짝 어수선했다면, 어느 틈엔가 그런 기억은 싹 사라진 채 한가하고 느긋한 마음이 가득한 거였다. 함께한 윤 형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결코 전 직장의 동료가 아니라 그냥 친한 형으로만 여기는 나의 태도 또한 그라서 가능했다고 본다. 온갖 말들로 나를 놀리고는 '농담이야~'로 마무리하는 윤 형의 그 농담 아닌 진담들 덕분에 오히려 나도 부담 없이 형을 같이 놀릴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숙소에서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또 같이 보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일찍이 형의 일정에 맞춰 함께 다녔다.

업무 차 미팅 두 건이 있었는데 나는 같은 차로 이동해서 미팅 시간 동안에만 따로 있는 식이었다. 반나절 정도는 그냥 인근을 혼자 둘러볼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전날부터 느꼈지만 이게 나는 일이 없는데 일이 있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게 은근히 재미있는 거였다. 게다가 윤 형도 그리 타이트한 일정은 아니었던 지라 그렇게 다니다가 오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같이 올라가는 게 따로 움직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IMG_5629.JPG
IMG_5626.JPG


전주 시내에서의 오전 미팅을 마치고, 오후에 예정된 익산에서의 미팅까지 시간이 충분하여 우리는 브런치의 여유를 즐겼다. 역시 서울보다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수제버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노트북을 꺼내어 내 할 일을 찾아서 하며 대충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이동할 시간이 됐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생각지도 않았으나 졸지에 전주에서 보낸 이틀을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IMG_5635.JPG
IMG_5631.JPG


익산 변두리에 위치한 무슨 공기관을 방문해야 했기에 나는 잠시 인근을 홀로 산책했다. 작은 논두렁 너머로는 도로만 있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않았다. 때마침 백로 한 마리가 홀로 주위를 맴도는 모습을 구경하며 익산, 김제 등 너른 평야가 좋은 전북의 자연 풍경을 떠올려 봤다.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여 우산을 들고 다녔다. 전주나 익산에 하루를 더 있으라 해도 이제는 그냥 서울로 올라가는 게 나을 듯한 날씨였다. 어차피 저녁까지는 서울에 볼 일이 있었으므로 기차표는 이미 예매한 상태였다.




이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전주에서 이틀, 익산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뒤 돌아왔다.

옛 출장길을 모처럼 방문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친한 형의 동선에 맞춰 어지간히도 느긋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이를 통해 마음이 여유롭기도 했고 정반대로 분주하게도 느껴지는 묘한 기분이었다.


IMG_5645.JPG


용산역에 도착했더니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잠잠해지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내 바람이 다시 거세지고 빗줄기가 세지는 등 종잡을 수 없는 꾸물꾸물한 날씨였다. 해라도 쨍쨍했으면 바로 다른 지역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었을 텐데, 날이 그러고 보니 얼른 내 방에 가서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원래 썩 잘 짜여지고 계획적인 여행을 한 뒤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번 전주 여행은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근본 없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돌아보니 어수선하기만 하다. 그 가운데 걸핏하면 윤 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던 건 그만큼 내가 어떤 목적지보다는 동행과 보내는 시간에 의미를 두고 다녔기 때문일 테다.


전 직장이든 출장지든지 간에 나 또한 여전한 상태로 방문하지는 않기에 일단 여행을 시작하면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새로운 생각을 품게 된다. 이를 확인한 것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나름의 수확이 아니었다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퇴사자의 옛 출장길 여행 : 전주 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