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여행이었던 전주에서의 2박 3일 두 번째
밥을 든든하게 먹고 식당을 나왔다. 아까 전의 풍남문도 풍남문이었지만 역시 한옥마을의 지붕 너머로 노을 섞인 전주의 하늘이 따스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던 오후 무렵이었다.
일반적인 전주 여행객이었다면 경기전에 들어간다거나 전동성당을 구경했겠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전의 에피소드를 함께 얘기하며 한옥마을의 명소들을 그저 무심히 지나쳐 걸었다. 이제는 한 번쯤 안 다녀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주 한옥마을은 유명하고 흔한 여행지이므로 많은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첫 여행지로서의 설렘보다는 익숙한 장소로서의 기억이 반가움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분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일' 때문에 수도 없이 골목들을 오갔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저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부른 배를 꺼트릴 목적으로 전망 좋은 카페 '전망'을 찾아갔다.
10년 전에는 평 당 얼마였는데 지금은 얼마가 됐느니 하는 따위의 그런 말들이었다. 탁 트인 좋은 전망을 눈 앞에 두고 너무 팍팍한 게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리 테이블 옆에서 자기들 사업 얘기로 한창이던 아저씨들에 비한다면야 우리의 비현실적인 대화는 그래도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기왓장 하나도 못 가졌으면서 만약에 저 한옥이 내 것이었다면 어쩌고 하며 떠들던 우리 얘기를 누가 들었으면 어땠을까.
또 다른 옆 테이블에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커플이 사이좋게 셀카 삼매경에 빠져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풋풋한 그 모습에 나도 잠시 망상을 멈추고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경치를 즐겼다. 그러나 형과 나는 이내... "쟤네들 이 시간에 여행 중인 거면 당일치기는 아니겠지?" 라며 커플 입장에서의 전주 여행이 지닌 지리적 이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과연 이 남자들의 사고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마음이 삐뚤어서가 아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각도 그대로 한 번 삐뚜름하게 바라본 한옥들의 모습이다. 전통 양식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옛 기와집들의 구조가 정말 이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망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의 모습은 꽤 특색 있는 여행 컨텐츠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관광지의 저녁답게 일찍이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주위가 차분해진 한옥마을이었다.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윤 형이 말했다. 낮의 활기찬 전주 한옥마을보다 오히려 이렇게 어둠이 깔린 고요한 느낌이 좋다고. 모처럼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그 말에 동조하며 형을 한 번 쳐다봤다. 어김없이 입가를 씰룩이던 형은 뭔가 강렬한 몇 마디로 나를 놀리는 말을 했다. 지지 않고 나도 맞받아서 농을 하며 서로 킬킬댔다. 역시 남자들은 둘이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가 훨씬 정상적인 법이다.
더는 한옥마을에서 할 게 없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형이 찜질방에 가자고 했다. 요새 업무가 힘들단 얘기를 장난 섞어서 자주 했는데 확실히 형이 피로가 쌓였나 보다 싶었다. 나도 잘 아는 사우나&찜질방이 하나 있었다. 스파라쿠아라는 곳인데 서울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시설도 무척 좋아서 예전에 고된 일이 끝나면 가끔 찾던 장소였다. 개인적으로 전주에서 1박 여행을 할 경우 굳이 비싸고 좁은 한옥 스테이에 집착하느니 하루 정도는 이곳 찜질방을 이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꽤 한참을 드러누워서 실없는 소리도 하고 몸도 지지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별로 일이랄 만한 걸 하지 않은 나로서는 고된 업무 끝에 피로를 풀러 온 게 아니라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윤 형은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찜질방에서의 휴식에 나보다 더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런 찜질방을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하나 지으면 어떨까' 라는 망상에 대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문득 근래에 봤던 영화, '트립 투 스페인' 이 떠올랐다(https://brunch.co.kr/@hyuksnote/102). 남자 둘이서 여행을 하며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받는 포맷이 딱 우리와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비록 영화에서는 스페인 이곳저곳을 돌며 영국 문화 전반의 이야깃거리를 풀어낸 데 반해 우리는 기껏(?) 전주 어귀에서 이런저런 잡설을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트립 투 전주' 도 썩 흥미로운 소재이자 서사가 될 것 같기는 하다.
사우나를 하고 난 뒤라 더 상쾌한 기분으로 밤의 전주를 산책했다. 꽤 큰 하천 지류인 삼천을 가로지르는 효자다리를 건너며 둘러본 야경이 좋았다. 한강의 그것보다는 규모가 작긴 했지만 오히려 밤공기는 서울보다 나은 듯했다.
환한 달빛 아래 어느덧 전주에서 이틀이나 보낸 게 실감 나지 않는 밤이었다. 오전만 해도 전 직장의 사무실을 보며 퇴사 이전의 기억들로 머리가 살짝 어수선했다면, 어느 틈엔가 그런 기억은 싹 사라진 채 한가하고 느긋한 마음이 가득한 거였다. 함께한 윤 형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결코 전 직장의 동료가 아니라 그냥 친한 형으로만 여기는 나의 태도 또한 그라서 가능했다고 본다. 온갖 말들로 나를 놀리고는 '농담이야~'로 마무리하는 윤 형의 그 농담 아닌 진담들 덕분에 오히려 나도 부담 없이 형을 같이 놀릴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숙소에서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또 같이 보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다.
업무 차 미팅 두 건이 있었는데 나는 같은 차로 이동해서 미팅 시간 동안에만 따로 있는 식이었다. 반나절 정도는 그냥 인근을 혼자 둘러볼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전날부터 느꼈지만 이게 나는 일이 없는데 일이 있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게 은근히 재미있는 거였다. 게다가 윤 형도 그리 타이트한 일정은 아니었던 지라 그렇게 다니다가 오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같이 올라가는 게 따로 움직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전주 시내에서의 오전 미팅을 마치고, 오후에 예정된 익산에서의 미팅까지 시간이 충분하여 우리는 브런치의 여유를 즐겼다. 역시 서울보다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수제버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노트북을 꺼내어 내 할 일을 찾아서 하며 대충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이동할 시간이 됐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생각지도 않았으나 졸지에 전주에서 보낸 이틀을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익산 변두리에 위치한 무슨 공기관을 방문해야 했기에 나는 잠시 인근을 홀로 산책했다. 작은 논두렁 너머로는 도로만 있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않았다. 때마침 백로 한 마리가 홀로 주위를 맴도는 모습을 구경하며 익산, 김제 등 너른 평야가 좋은 전북의 자연 풍경을 떠올려 봤다.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여 우산을 들고 다녔다. 전주나 익산에 하루를 더 있으라 해도 이제는 그냥 서울로 올라가는 게 나을 듯한 날씨였다. 어차피 저녁까지는 서울에 볼 일이 있었으므로 기차표는 이미 예매한 상태였다.
옛 출장길을 모처럼 방문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친한 형의 동선에 맞춰 어지간히도 느긋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이를 통해 마음이 여유롭기도 했고 정반대로 분주하게도 느껴지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내 바람이 다시 거세지고 빗줄기가 세지는 등 종잡을 수 없는 꾸물꾸물한 날씨였다. 해라도 쨍쨍했으면 바로 다른 지역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었을 텐데, 날이 그러고 보니 얼른 내 방에 가서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원래 썩 잘 짜여지고 계획적인 여행을 한 뒤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번 전주 여행은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근본 없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돌아보니 어수선하기만 하다. 그 가운데 걸핏하면 윤 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던 건 그만큼 내가 어떤 목적지보다는 동행과 보내는 시간에 의미를 두고 다녔기 때문일 테다.
전 직장이든 출장지든지 간에 나 또한 여전한 상태로 방문하지는 않기에 일단 여행을 시작하면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새로운 생각을 품게 된다. 이를 확인한 것이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나름의 수확이 아니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