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사진 여행 : 경주-창원-대구-강릉-양양 편 첫 번째.
야,간만에 같이 여행 갈래?
오, 갑자기 웬일이래? 어디로?
일단 경주 갔다가, 창원이랑, 잠은 대구에서 잘 거고...
엥? 뭐야, 며칠이나 가자는겨 둘이서ㅋㅋ
1박 2일. 아, 그리고 강릉 쪽도 가야 한다 참!
이거 완전 ㅁㅊㄴ 아냐? 라는 의문보다는 모처럼의 동행 제안이 반가웠다. 초이는 프리랜서 사진 작가다.(그의 영어 성씨 'Choi'를 외국인 친구와 함께 부르느라 친숙해진 '초이'로 이하 호칭은 통일한다) 알고 보니 녀석은 해당 지역들의 레저 업체 사진 촬영 건으로 다니는 김에 겸사겸사 한량인 나와 동행할까 하는 거였다. 그러면 그렇지, 결혼까지 한 놈이 갑자기 일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자고 할 리는 없었다.
더 알고 보니 녀석이 다닐 촬영은 내가 전에 근무하며 소개해 준 여행/레저 업체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그 회사의 옛 출장길을 여행했던 나로서는(퇴사자의 옛 출장길 여행 1,2 참조 : https://brunch.co.kr/@hyuksnote/117, https://brunch.co.kr/@hyuksnote/118) 재미있는 인연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촬영이 어떠할지를 너무 잘 알겠어서 나는 오히려 망설였다. 반가움이야 둘째 치고, 이틀 간 경남과 강원 일대의 촬영 7건이라... 생각 좀 해 보겠다고 초이에게 대답하고는 첫 전화를 끊었다.
약 세 시간 후, 저녁을 먹고 있는데 초이에게 카톡이 왔다. 딱 두 글자였다.
"아직?"
'쉐키... 내가 재촉할 때는 조급해하지 말라면서 꼭 자기 기다리는 건 못 참더라.'
하지만 내가 좀 꾸물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음은 이미 가 있었다. 녀석이 이 정도로 채근하는 거면 다 이유가 있다. 오랜 친구인 녀석은 늘 내게 영감을 주곤 해왔다.
야, 가자. 운전 오래 할 테니 기능성 속옷
(실제로는 '라쉬X' 같은 분리형 팬티를 일컫는 날 것 그대로의 용어를 썼다) 입어.
ㅋㅋ 야 마침 대구에서 치맥 페스티벌 중이래
그거 구경하고 숙소에서 자면 되겠다.
어쨌거나 일은 일이었다. 초이는 내가 본 20년 이래로 가장 부지런히 새벽부터 나를 태우러 왔고, (그의 집에서 경주로 향하는 남쪽 방면에 우리집이 위치한 게 아주 다행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무더워지기 전에 수도권을 일찌감치 벗어나 남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에는 모처럼 지난 일들을 떠들며 이번 출장 겸 여행의 의미를 다졌다. 멀게는 대학생 시절 우리 둘은 한 달간 함께 미국 일주를 한 적이 있었고, 가까이는 2년 전쯤 경주에 같이 출장을 온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이번에 초이에게 일을 의뢰한 스타트업의 직원이었고, 그에게 막 사진 촬영 건들을 연결해 준 참이라 우리는 함께 업무를 하게 됨에 반가웠더랬다.
그랬던 우리, 여전하면서도 여전하지 않은 각자의 상황들 속에서 꽤나 프로 사진 작가인 친구를 따라나선 나. 이제 제법 글 작가 흉내 좀 낸답시고 간단하게나마 빨리 써서 공유하기로 한 여행기를 시작한다.
참, 아주 오랜만에 둘이서 차를 타고 다니려니 지난 5월에 봤던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이 떠올랐다는 건 '두 남자의 여행'이라는 테마에 있어서의 참고 사항.
https://brunch.co.kr/@hyuksnote/102
예상보다 액셀을 즈려밟던 초이의 서두름 덕분에 우리는 아침 식사를 경주 보문호 인근에서 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식당들 중에 골라서 들어갔다. 순두부 집이었다. 메뉴판에는 자연송이를 넣은 순두부 찌개가 1만 2천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초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주머니, 이거 진짜 자연산 송이예요? 비쌀 텐데"라고 했다. 그러더니 녀석은 9천 원짜리 일반 순두부 찌개를 시켰다. 나도 따라서 시켰다. 가끔 내 생각이 친구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는 걸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뭐 그렇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ATV, 레이싱 카트, 서바이벌 게임장 등을 보유한 레저 업체였다. 이른 시각인 데다 워낙 더운 날씨라 방문객은 없었다. 현장에서 차량을 몰 사람이 두 명 밖에 없었으므로 나도 탈 것 체험도 할 겸 촬영에 협조했다.
땡볕 아래에서 카트 레이싱을 하는 건 내 돈 주고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이긴 하다. 처음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사진을 찍는 초이를 앞에 두고 신나게 달리려니 미안했으나, 어쨌든 녀석은 돈 받고 하는 일이고 나는 안 해도 되는 걸 돕는 일이니 꽤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ATV까지는 그럭저럭 따라다니며 무료 체험을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긴 팔 긴 바지 군복으로 갈아입고 서바이벌 게임 촬영에까지 임하고 있었다. 난 이게 좀 문제다.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어? 어어~' 하다 보면 애초에 정했던 선을 넘어서 예상한 고생을 하곤 한다. 그다지 긴 촬영은 아니었다만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더웠단 말이다. 예정된 모델은 아니었으나 혹시 내 사진이 마케팅에 잘 쓰인다면 나를 아는 (주)레XX 담당자는 소정의 금액을 입금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두 번째는 열기구 업체였다. 제주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조금씩 늘고 있는 일반 열기구들과 달리, 와이어에 연결되어 수직으로만 높이 오르는 대형 열기구(국내 2대뿐)였다. 생각보다 크고 독특한 기구라서 안 타도 그만이라던 애초의 생각은 그만 없어지고 촬영을 돕기 위해서라도 같이 타야겠다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 탄 열기구는 그러나 웬걸. 아무리 안전장치가 잘 돼 있다한들 두 손 두 발 자유로운 상태로 둥실둥실 상공에 실려 올라가려니 슬슬 아득해지는 거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방금 전의 지면이 까마득했다.
너 고소공포증 있냐?
아니 없었는데, 방금 생긴 것 같아
촬영하느라 정신없는 초이에 비해 아래를 계속 내려다보던 나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니 다른 게 아니라 '사고가 나면 어쩌나'란 두려움이 스릴과 즐거움을 짓누르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높은 곳에 두 번이나 올랐다. 한 번은 같이 탔고, 한 번은 아래에서 열기구가 상승하는 걸 촬영하는 초이에 맞춰 안에서 밖을 촬영하는 보조 컷을 도왔다. 이제는 내가 소속된 회사도 아니다 보니 자유로이 덧붙이자면, 여행/레저 관련 업무에는 생명수당 같은 것도 책정돼야 한다고 봅니다만.
사실 촬영 후에 다른 곳을 여유롭게 다닐 만한 시간은 없었다. 꼭 정해진 시간대로 이동하느니, 먼저 업체에서 빨리 끝날 경우 다음 방문을 앞당겨서라도 일을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해가 높이 뜨기 전에 야외 촬영을 마치고자 경주에서 서두른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창원에 도착했다. 세 번째 방문 업체는 VR체험장이었다. 최근에 발전된 설비들로 넓은 공간에 생겨나고 있는 대형 오락 체인의 창원 지점이었다.
이번에는 해당 업체의 직원들 위주로 촬영을 진행했고, 나는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몇 가지 게임 진행과 기타 스냅샷에 협조했다. 확실히 초창기 VR 기계들에 비해서 다채롭고 그럴듯한 게임이 많았다. 무엇보다 덥지 않은 실내 촬영이라 괜찮았다. 장거리 이동에, 두 군데 실외 촬영에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오후 일찍부터 몸이 후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또 다른 VR체험장이었는데, 마침 김광석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잠시 둘러볼 겸 인근에서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너무 더워서 오히려 메뉴 선정이 쉬웠다. 시원한 콩국수. 김광석 거리 맛집을 검색해서 갔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듯한 캐주얼한 분위기로 인해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주문했다. 기껏해야 걸쭉한 두유 국물의 국수이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엄청 잘못된 편견이었다! 치자면을 사용하고 콩을 직접 갈았다는 방천국수의 콩국수는 정말로 시원하고 맛있었다.
야, 어릴 땐 콩국수 절대 안 먹었는데, 그치?
그니깐, 요샌 콩국수 엄청 땡긴다.(호로로로록 좝좝)
식후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김광석 거리를 산책했다. 시원하고 맛있는 콩국수 덕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서른 즈음에'를 크게 부르고 다녔다. 내 노래가 경쾌한 '일어나'로 바뀌어 있을 무렵에는 대충 근처 한 바퀴를 빠르게 둘러보느라 땀이 다시 줄줄 흘렀다. 과연 대프리카다웠다. 그 와중에도 몇 달 전 JTBC에 출연한 古김광석의 전 부인이 중언부언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트는 김광석 음악의 음원 수입이 그의 사후 문화 사업과 살아있는 친족들을 위해서만 사용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인다.
두 번째 VR체험의 사진과 언급은 생략한다. 숨 가쁘게 세 지역을 돌아다닌 첫날의 촬영을 무사히 마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대구 치맥페스티벌이었다! 게다가 초이와 나는 미리 '치맥 비치존'의 입장권도 사놓은 상태였다. 치맥 페스티벌 행사장 안쪽에서 작게나마 풀파티 장소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여자 친구 몰래도 아니고, 대구의 치맥 축제 구경을 간 김에 겸사겸사 열기도 식힐 겸 저녁에 들른다는 명분(이자 본래의 순수한 목적)은 얼마나 그럴듯한가!
으흐흐, 1박 2일의 짧은 일정용 단출한 짐에서나마 큰 비중을 차지하던 비치 바지였다. 대구 모처의 모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선 나와 초이는 신이 났더랬다. 비록 장소를 혼동해 택시를 한 번 더 타야 했지만 그 정도 바보짓은 해야 여행 기분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대구 시내 어느 곳에서도 치맥 페스티벌에 관한 안내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여겨지던 우리였다. 택시 기사님조차 그 유명하다는 치맥 축제의 일정을 모르고 계시는 거였다. 음, 역시 지자체 행사는 소위 '뻥튀기'가 심하단 말인가. 분명 몇 십만 명의 축제로 몇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거늘...
"설마 온라인 쇼핑몰에서 산 티켓이 내년 꺼는 아니겠지?" 라며 휴대폰을 다시 확인한 후라야 안심을 하던 덤앤더머였다. 이윽고 치맥 페스티벌이 열리는 두류공원 일대에 도착하자 저 멀리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