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 인간 - 바람#2

평범한 능력을 초월한 이들의 이야기 두 번째.

by 차돌


오후에는 업무에 치이느라 그전까지의 일들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J가 다니는 회사는 그의 첫 직장이었다. 2년 차 사원인 그로서는 자기가 해내는 업무량이 과연 적당한 수준인지, 그에 대한 보상은 만족스러운지 깊이 따져볼 여유 같은 건 아직 없었다. 그저 상사들이 시키는 대로, 회사가 원하는 대로 주어진 업무를 배우고 처리해 나가다 보니 한두 해쯤은 훌쩍 지나있던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점심 메뉴가 김치찌개냐 돈까스냐에 상관없이 김 팀장은 김 팀장일 뿐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팀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예민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새로운 프로모션을 추진 중인 제휴사로부터 팀장에게 직접 걸려온 전화가 화근이었다. 점심을 잘 못 먹기라도 했던 건지 그쪽 담당자는 여러 변경 사항들을 갑작스럽게 요구했다. 말이 제휴사이지 실은 갑을에 가까운 상황이었기 때문에(J의 회사가 을이었음은 물론이다) 팀장은 모든 조건에 흔쾌히 동의했고, 이로 인한 업무 부담은 고스란히 직원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후로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와 업무 메신저에 시달리느라 J는 도무지 다른 생각 같은 걸 할 여유를 낼 수 없었다.


저녁이 다 돼서야 그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팀의 분위기는 퇴근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무리될 듯하던 업무들이 오히려 늘어나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늦게까지 일해야만 한다는 판단이 드는 순간부터 직원들의 업무 효율이 늘기는커녕 근태만 늘어지는 풍경을 매번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하기 위해 혼자 열을 올려봤자 주위 동료며 상사들이 일을 붙잡고 있는 통에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컨대 J가 느끼기에 야근은 야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업무에 개인의 주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팀장은 짐짓 선심을 쓰듯 저녁을 먹고 오자며 팀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밥은 거르지 말아야 한다나.


'쳇, 정말로 이게 위해 준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저녁은 원래 집에서 먹는 게 아니냐고요-'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억지웃음을 지으며 팀장을 바라보던 J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점심때의 일이 떠올랐다.


'가만, 아까처럼 다시 한번 빌어볼까?'

만약 자신의 바람대로 뭔가가 이루어지는 행운이 계속된다면,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확보하거나 팀장의 점심 선택을 바꾸는 일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성취라면 좋을 것 같았다.


'야근을 없애달라고 빌어볼까? 사무실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어 달라고? 아니면 김 팀장을 집에 가게 해 달라고 빌어볼까?'

저녁 식사로 김치찌개를 먹으러 향하면서(물론 김 팀장의 제안결정이었다) J는 잠시 팀장을 없애달라고 빌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게 그리 간단할 리는 없었다. 결국 당면한 회사 업무와 관련한 쪽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어졌으나, 그 또한 아까처럼 속으로 쉽게 중얼거리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우선 야근 자체를 없애고 싶다는 바람은 아무리 봐도 애매하다고 느껴졌다. 현재 남은 업무만 없애야 할지, 프로모션 업무 전체가 사라지면 좋을지 모호했다. 어차피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인 데다가 제휴사와의 관계도 얽힌 일이기에 그러한 소원에는 여러모로 뒤엉킨 결과들이 예상됐다. 그렇다면 컴퓨터의 작동을 방해하는 건? 그게 당장 이뤄진다면 어쩔 수 없이 근무를 중단해야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컴퓨터로 밤새 자료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김 팀장을 집으로 보내는 일 또한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조삼모사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은 업무량은 뻔한데 상사만 집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야근이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건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렇듯 바람 사항에 따른 결과들을 예측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아파져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 메뉴나 한 번 또 바꿔볼걸... 금방 바닥을 드러낸 찌개 그릇을 뒤적이며 고기 한 점을 찾던 그의 눈에는 흐물흐물한 김치 몇 조각만 보였다. 그날의 운은 다 쓴 걸로 여기기로 했다. 엉뚱한 상상을 하는 데에도 어지간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아니었다.


늦은 퇴근길에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푸닥거리를 했으나 막상 스트레스를 풀지는 못했다. 성과급이 터무니없이 적다며 먼저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에게 야근 때문에 힘들단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실제로 야근 수당 안 받느냐는 그의 질문에 괜히 마음만 심란했던 적이 있다) 그날 있었던 세 번의 우연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으나 J는 결국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마음속으로 빌었더니 만원 지하철에서 앞사람이 일어났다거나, 팀장이 내가 원한대로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점심 메뉴를 고르더라는 따위를 말해봤자 녀석이 '와~ 대단한데?' 하고 관심을 가져 줄 리가 없었다. 각자의 삶이 그 궤도와 방향을 달리하면서부터,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기보다는 감추고 들어주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일이라고 언제부터인가 확신하던 그였다.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간 그는 씻을 겨를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회사일도 회사일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유난히도 피곤한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 휴대폰 알람이 귓가에 울렸다. 얄미운 소리였다.


" ♬♩♪ "

"으음......."

" ♬♩♪ "


꺼도 몇 분 후 다시 켜지는 알람 소리에 J는 마지못해 반쯤 눈을 떴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휴... 시간을 돌리고 싶다 제발...'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시간! 밑져야 본전인데 지금 한 번 빌어볼까-'


J는 감겨있던 눈을 더욱 질끈 감고 마음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중얼중얼 입 밖으로 소리도 내며 시간을 돌려달라는 기도를 반복하는 거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겠지만, 평소에도 가져봤던 생각을 더욱 간절하고 반복적으로 빌어보는 것뿐이라 손해 볼 일도 아니었다.

'시간아 어젯밤으로 돌아가라... 어젯밤...밤12시...'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째깍거리는 벽시계는 여전히 7시를 향해 뒤뚱이고 있었다.

'제발... 딱 두 시간만 어떻게 안 될까요 신이시여...'

절박한 심정으로 이번에는 두 시간 전 새벽으로 돌아가 달라는 말을 나직이 반복했다. 이번에도 역시 시계는 그대로였다. 잠이 싹 달아날 만큼 간절히 비느라 그래도 지각은 모면하게 된 그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며 그는 잠결에 빌었던 소원의 간절함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J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 건 금방이었다.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원 지하철에 오징어처럼 말려 들어가느라 아침부터 피로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더는 탈 수 없을 것만 같은 지하철 한 칸에는 어째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어제처럼 앉아서만 갈 수 있다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그래, 이거나 또 해 보자.'

시간을 돌리지는 못할지언정 어제와 같은 결과를 얻는다면 당장은 행복할 것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소원을 조금 달리해서 빌어보기로 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더 이상은 우연이 아닌 자신의 의도대로 뭔가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J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이 금방 내리게 해 달라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더욱 간절하게 되뇌느라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았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러자 두 명 모두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였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거의 멈춰 섰을 무렵에야 간신히 사람들을 뚫고 나간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듯했으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J는 비로소 확신했다.

'나에게 뭔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다.'


한 두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인 걸까? 뭔가 다른 게 더 있을까? 확실한 건 이제는 만원 지하철에서 힘겹게 선 채로 출근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날도 회사에서 바쁜 건 마찬가지였지만 J의 머릿속에서는 이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모처럼 살 맛난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로 그의 가슴은 묘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당장 눈 앞에서 바꾸고 싶은 것들부터 차근차근 소원을 빌어 보기로 했다. 마침 평소에 그와 썩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직원이 눈에 띄었다. 조 양과 최 군. 둘이서 짜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각자가 심기를 거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J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그들로부터 받던 참이었다.

'조OO 와 최OO는 사무실에서 서로 욕하며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파티션 너머로 슬쩍 둘의 동태를 살피며 J는 점심 이후의 나른한 시간을 활용(?)했다. 그렇게 열 번쯤은 되뇌었을까, 각자의 눈 앞에 놓인 모니터를 응시하는 조 양과 최 군에게는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오, 이것도 안 되는 건가. 난 그냥 지하철에 앉은 사람들이나 쫓아내는 능력자인 거야?'


눈 앞에서 싸움이 붙기를 내심 바라던 J는 아침에 겪은 이상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시간을 돌리는 일 같은 건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직장 동료 둘을 조종하는 건 어쩐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던 데다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초조한 거였다. 그때였다.


"야 조OO! 이거 뭐야?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메일을 이 따위로 나한테 보내?"


최 군이 씩씩거리며 조 양의 자리로 향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 이 따위? 지금 말 다했어? 뭘 했다고 갑자기 나한테 와서 난리야 이 자식아!"


앙칼지게 맞받아치는 조 양의 기세는 최 군 이상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 건지, 평소 이상으로 날이 선 그녀의 반응에 최 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더 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씨X, 보자 보자 하니까 뭐 이 자식? 나랑 한 번 해 보자는 거야 뭐야?"


사태는 순식간에 커지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직원들은 매우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둘의 기세가 워낙에 흉흉해서인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야!!!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안 보여?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무실에서!!"


이럴 때야말로 빛을 보는 김 팀장의 성질이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욕을 내뱉으며 다투는 사원들의 행태에 그가 고함을 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그제야 직원들은 둘에게 바짝 붙어 달래며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 팀장의 기세 때문인지 싸움의 당사자들도 더는 큰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마지못한 듯 동료들에게 이끌려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J는 통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처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속이 시원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얄미운 그들이었는데 자신이 마음속으로 외친 대로 눈 앞에서 서로 다투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이걸로 J는 자신의 확장된 '능력'을 똑똑히 확인한 셈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든지 눈 앞에서 저들을 골탕 먹일 뿐만 아니라 다른 소원들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깔린 심각한 공기만 아니었다면 그는 휘파람이라도 한 번 크게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초월 인간 - 바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