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 인간 - 바람#1

평범한 능력을 초월한 이들의 이야기, 첫 번째.

by 차돌


그도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J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사실 그 자신은 어떤 면에서는 평범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많았으나 또 어떤 면에서는 비범하다고 자신하는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J가 느끼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느냐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세상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J는 그렇게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을 하루하루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처음으로 자각한 건 6개월 전쯤의 어느 출근길이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사소한 일이었지만, 눈 앞에서 벌어진 '그 일'에 대한 뚜렷한 기억 이후로 J는 자신이 더는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제발 이 사람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으면...'

그날도 어김없이 J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하던 중이었다. 바로 다음 역은 특히 많은 사람들이 타는 환승역이라 그는 일찌감치 적당한 손잡이를 잡은 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 문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 통에 J의 몸은 앞에 앉은 중년 남성을 향해 활처럼 휘어져 들어갔다. 코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J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이 사람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리면 좋겠다고. 마치 주문처럼 그렇게 반복적으로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잠시 후였다. 눈 앞의 중년 남성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 무리를 헤치고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그의 하차 덕분에 J는 빈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전에는 별로 내릴 만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토록 서둘러 일어나서 내리는 남자의 행동이 왠지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따라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방금 전 자신에게 일어난 행운이 새삼스러운 J였다.


지나치게 반복되는 일상은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 온통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그 변화가 평소에도 늘 바라던 생각에 의해 벌어진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특별한 일로 한 번쯤 여겨볼 수 있을 것이다. J의 생각이 바로 그러했다. 만원 지하철에서 늘 눈 앞의 사람이 내리기를 바라곤 했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후의 만족감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환승역에서 내린 J가 다음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잠시 후에도 똑같은 소원을 빌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러한 만족감을 한 번 더 느끼고 싶다는 엉뚱함이 일상의 권태를 뚫고 나온 작은 결과일 뿐이었다.


이윽고 다음 지하철에서도 그는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고개를 옆으로 크게 젖힌 채 잠들어 있는 여성이었다. 그 모습에 속으로 잠시 웃음을 짓다가 J는 이내 앞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주문을 외워봤다.

'내려라, 내려라, 일어나서 다음 역에 내려라...'

그때였다. 눈 앞의 여자가 번쩍 눈을 뜨며 고개를 똑바로 드는 거였다. 그리고는 좌우를 바삐 살피더니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 문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였다. J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우물쭈물할 겨를은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스윽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곁눈질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잽싸게 빈자리에 털썩 앉으면서도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이 멈추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잠에서 깨어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J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굉장한 우연'쯤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가 겪은 일들에 비한다면 지하철에서의 사건은 차라리 우연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이어 벌어졌던 행운 덕분인지 그날 오전 사무실의 시간은 평소보다 빨리 흐르는 듯했다.

모처럼 지하철을 탄 내내 편히 앉아서 왔다며, J는 옆자리에 앉은 김 군에게 아침의 일을 자랑하며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가 생각하자마자 그랬다고. 이 정도면 이거 내 힘으로 그렇게 된 거 아닐까? 하하."

"에~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형? 그럼 우리 팀장님한테도 한 번 해 봅시다. 또 그놈의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고 할 것 같단 말이에요."

"어, 한 번 해볼까? 이왕이면 팀장이 잘 안 먹는 걸로 생각해 봐야겠다. 뭐가 있을까?"

"돈까스 어때요? 난 팀장님 돈까스 먹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가만있어봐, 이번엔 내가 한 번 해볼까요? 지하철에서 어떻게 했다구요 형?"

"아, 아니 뭐 딱히 어떻게 한 건 없고... 팀장이 돈까스 먹으러 가자고 하면 진짜 대박이겠다 야, 하하"


두 살 많은 자신을 직장에서도 형, 형 하며 거리낌 없이 따르는 김 군은 이렇게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대충 얼버무리긴 했어도 덕분에 J는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 번 해 볼만한 생각이지 않은가?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은 꼭 같은 김치찌개 식당을 고집하는 김 팀장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곤욕인 그들이었다. 팀원들 중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점심을 따로 먹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딱히 식성이 까다롭지 않은 J로서도 삼일 연속으로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자고 할 때만큼은 팀장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 군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J가 묘한 호기심을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침 저편 너머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김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J는 입을 꽉 다물고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돈까스...돈까스... 김 팀장, 이번엔 제발 돈까스 먹자고 말해라...'


"우리, 오늘은 돈까스 어때?"


"예??! 팀장님 웬일이세요 갑자기?"

"아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요 앞에 돈까스 집 하나 있지 않던가? 오늘은 거기 가자고~"

"......"


그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희한했다. 돈까스라니, 김 팀장이 돈까스를 다 먹으러 가자고 하다니. 그것도 방금 내가 콕 찍어서 되뇌인대로가 아닌가... 슬쩍 김 군의 모습을 보니 그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밖으로 향하는 J의 옷깃을 붙잡으며 김 군은 속삭였다.


"와, 형 뭐예요 이 상황? 나한테도 무슨 능력이 생긴 건가?


뜻밖의 반응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선택이 팀장의 말과 일치한 걸 기막힌 우연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J가 실제로 김 팀장을 향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달리 연달아 세 번씩이나 비슷한 경험을 마주한 J로서는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우연으로 여길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형, 이번에도 뭐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거나 한 건 아니죠? 분명히 내가 돈까스 어떻냐고 했잖아요. 앗, 팀장이 설마 내 말을 들었던 건 아니겠죠?"

"어? 들었을 리가 없지. 우리가 말할 땐 멀리 있었잖아. 신기하네 근데 정말~"

"이따 우리 로또라도 하나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당장 월급이나 좀 오르면 좋겠지만~"


괜히 신이 나있는 김 군의 모습을 보며 J는 다시 긴가민가했다.


'그래, 누구나 사소한 일쯤은 자기가 바라던 대로 될 수 있잖아? 팀장이 돈까스를 먹자고 한 건 분명 이 녀석이 먼저 말했는데 하필이면 이어서 벌어진 일이고...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 번이다 세 번. 분명히 이번에도 내가 속으로 빌었잖아 팀장을 보면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맞은편에서는 김 팀장이 나이프로 느릿느릿 돈까스를 썰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왜 이걸 먹고 있나'라는 표정인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불편한 J였다. 방금 입 안에 넣은 돈까스 한 조각이 유난히도 까끌거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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