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능력을 초월한 이들의 이야기 세 번째.
앞서 겪은 사소한 일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소원을 이뤄내며 그는 하루하루가 신나고 즐거웠다. 오래된 영화인 <브루스 올마이티>가 생각난 그는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보기도 했다.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주인공이 이제 어찌나 친근하게 느껴지던지! 물론 영화에서처럼 차들의 행렬을 좌우로 갈라놓는다거나 여자 친구의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따위의 일들을 이뤄내기란 불가능했지만(실제로 첫 번째는 도로에서 한 차례 시도해 봤으나 실패였고, 두 번째는... 일단 J는 여자 친구가 없는 데다가 다른 여성들을 상대로도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테스트를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은 분명히 인간을 초월한 어떤 힘이 분명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마구잡이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J는 근 1개월에 걸친 조심스럽고도 다양한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어떠한 '소원'을 마음속으로 수차례 빌면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2. 단, 물리적·시간적·공간적 변화는 아무리 바라더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없던 물건을 눈 앞에 생기게 한다거나,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가고 싶은 장소로 이동한다거나 하는 초인적인 능력은 불가능하다.
3. 소원의 난이도만큼이나 달성에 소요되는 시간에는 차이가 난다. 지하철에서 앞사람을 일으키는 일처럼 단순한 경우에는 거의 즉각적으로 이룰 수 있으나, 그보다 어려운 일을 이루려고 하면 하루에서 이틀까지도 소요될 수 있다.(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만큼의 소원을 시도하고 확인한 적은 없다)
4. 바라는 사항은 최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게 좋다. 그래야만 상황에 맞게 벌어지는 일을 확인하기가 용이할뿐더러, 실제로 소원이 이루어진 경우들을 종합하면 어김없이 바람 사항이 구체적일 때에만 변화가 일어났다.
5. 소원을 몇 번 이상 빌어야 하는지, 하루에 능력을 몇 차례나 사용할 수 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속으로 중얼거리는 외에도 바람 사항을 '생각'하는 일까지 완전히 컨트롤 하기는 매우 힘든 데다가, 모든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는 건 아니므로 날마다 정확한 집계를 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많은 일들을 이루어 냈으나 매번 마법처럼 눈 앞에서 어떤 결과를 얻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J는 나름대로 일정한 조건에서 테스트를 진행해 이를 기록함으로써 자신이 지니게 된 능력의 한계와 특이점을 찾아낼 수 있던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거나 시공간을 조작할 정도의 '슈퍼히어로'급 능력은 아니더라도 J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주로 다른 사람의 언행을 조종하거나 어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는 서서히 능력을 계발했고, 이를 통해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소원들을 하나둘씩 이루어 나갔다. 우선 회사에서는 얌체 같은 조 양과 최 군이 사무실에서 큰 소란을 한 차례 더 일으켰으며, 각자의 업무에 큰 과실을 범하고는 결국 둘 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니, 정확히는 J가 그들을 그만두게 '만들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나 깐깐한 김 팀장이 거듭하여 J를 칭찬하는 일이 벌어지자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요컨대 J는 직원들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지 않고도 특정 인물과 상황의 변화를 통해 자신에게 좋은 방향의 파급 효과가 일어나게 하는 법을 터득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사란 월급을 받기 위해 억지로 다니는 곳이었지만, 더 이상 싫어하는 동료를 반복적으로 마주하거나 원치 않는 업무를 떠맡지도 않게 된 J에게 사무실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쾌적한 공간이었다. 만약 현재 월급의 두 배를 받는 대신 예전처럼 쫓기듯 출퇴근하겠느냐, 아니면 월급은 여전하더라도 지금처럼 마음먹은 대로 여러 가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꿔가며 다니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J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었다.
그는 대학생 때 짝사랑했던 여자 후배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하게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녀와 세 차례나 술을 마셨고, 세 번째 만남에는 결국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에 이르렀다. J에게는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흔해빠진 카사노바가 아닌 낭만적인 개츠비와 같은 인물이 좋았다. 물론 비극적인 소설의 결말까지를 원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소설의 인물까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J는 어느새 스스로를 한 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기게 되었고,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필요한 설정이란 '연애의 고수'정도로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영등포의 모텔도 아닌 을왕리의 펜션에서 자신의 작은 소망을 먼저 실현시켰다. 일주일 만에 세 번을 만나면서 여자의 취향과 욕구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여기에 그동안 연마한 능력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그는 5년 만에 다시 만난 여자 후배와 5일 만에 1박 여행을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특별한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최근에 집안일로 울적했다든지, 밤바다를 보며 조개구이를 먹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내기란 힘들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애초에 인스타그램 팔로잉 만으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게끔 만드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다.
유난히도 하얀 펜션 침대에 누워 옆에서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며, J는 또 다른 옛 영화 한 편을 기억해 냈다. <왓 위민 원트>. 자신은 그저 이 여자의 마음을 얻어냈을 뿐이라고 되뇌며, 그는 어느새 그녀가 만족스럽게 눈을 뜨면서 바다를 보러 나가자고 말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수차례 바라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과 연애 활동에만 몰두할 만큼 J의 바람이 소소하게 그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돈을 왕창 벌어서 회사도 그만두고 해외여행도 다녀보자며, J는 차근차근 테스트를 해 나갔다. 먼저 토요일 저녁 시간에 로또 당첨 발표가 나기까지 내리 1시간이나 소원을 빌었으나 허탕을 쳤다. 그러자 그는 다음 주에는 3일, 그다음 주에는 4일씩 생각날 때마다 눈을 감고 '로또 당첨'을 간절히 중얼거렸으나 모두 허사였다. 역시나 '당첨'이라는 포괄적인 바람만으로는 6개의 숫자를 자신이 구매한 로또 용지와 일치시키기란 힘들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저녁, 그날도 J는 어김없이 로또 당첨 방송을 유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공을 차례로 뱉어내는 기계를 보던 그는 이윽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사람 마음만 바꾸란 법이 있겠어? 숫자를 지정해서 빌어보자'
'2, 7, 15, 22, 37, 45... 2, 7, 15, 22...'
다음 주부터 J는 자신이 구매한 로또 번호를 콕 집어서 되뇌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시던 부모님도 매주 토요일마다 채널을 돌려 로또 방송에 몰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더니 한 마디 하실 정도로 그는 집요했다.
"얘, 매번 그렇게 방송을 뚫어져라 본다고 5천 원이라도 당첨이 되겠니?"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도 참... 아차,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2, 7, 15...'
이내 정신이 흐트러진 걸 알아채고 다시 숫자에 몰두하는 J였다. 하지만 그 주도, 그다음 주도 끝내 6개의 숫자 모두를 맞출 수는 없었다. 겨우 3개의 숫자가 일치한 적이 있었는데, 평소에도 그렇게 당첨된 경우는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이게 소원을 빈 덕분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했다. 아무튼 거액의 복권 당첨을 성공시키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는 듯했고, 아무리 구체적인 '바람'이라 한들 방송 너머에서 기계가 뽑아내는 숫자 6개를 변화시키기에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J는 4개월에 걸쳐 매주 꾸준히 로또 당첨을 기원했으나 얻어낸 결과란 5천 원 당첨 4차례가 전부였다. 사실 숫자 3개를 맞추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한 달에 한 번 꼴로 당첨이 됐으니, 능력이 조금은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매번 다른 숫자로 로또를 구매하곤 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