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의외의 시작과 뜻밖의 전개와 사랑의 결말, 음악과 함께한 감미로운 영화.

by 차돌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로 감상했습니다.

· 스포는 일절 없습니다.

· 음악 영화는 아니지만 잔잔한 선율이 충만한 작품이며, 복잡한 서사를 지니지 않았지만 그보다 깊은 여운과 감동이 있었기에 본문에 앞서 추천의 소감을 밝힙니다.(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툰 뒤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후회하는 남자분들에게 특히 좋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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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긴긴 해변을 나란히 걷는다.

자박자박, 발을 옮길 때마다 조약돌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다. 백사장만큼의 밀도를 지니지 못한지라 둘이 밟는 걸음마다 움푹움푹 자국이 남는다. 덕분에 더디 걷는 그와 그녀는 두 손을 꼭 잡고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남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플로렌스~ 에드워드~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상냥함이 가득 묻어난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사이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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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가 사랑을 쌓아 온 과정들이 몇 차례 액자식으로 등장하며 관객들은 둘 사이를 이해해 나간다. 이윽고 스크린 속 '현재'의 둘은 호텔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준비된 룸 서비스가 도착하여 근사한 식사로 이어지는 걸 보니 어떤 기념일 같기도 하다. 아, 알고 보니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신혼 여행지를 찾은 부부다!


수줍은 듯 준비한 듯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분위기를 잡는 남자의 모습이 어딘지 어설프다. 그런 그를 애틋하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여성 또한 사랑에 능숙하다기보다는 서툴고 순수해 보인다.


이쯤 되면 영화는 막 사랑의 결실을 맺은 남녀가 겪어나갈 이야기를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원작 소설을 보지 않았고 내용도 잘 모른 채 들어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이 초반에 의외로 코믹한 상황들까지 연출되며 이 멜로 드라마는 뜻밖에 가벼운 스토리가 아닐까 하는 예상까지 조심스레 해 볼 수 있다.(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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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플로렌스는 음악가다.

영화 공식 소개 이외의 스토리 노출은 삼가고 싶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해 두겠지만, 아무튼 4중주단을 이끌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에드워드의 사랑뿐만 아니라 영화 <체실 비치에서> 전체의 감성을 불러일으킴에 분명하다.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 아는 만큼 들리겠으나 이들의 음악이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시사회 상영이 끝난 후 음악 감독인 댄 존스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여주인공 플로렌스의 연주 녹음 담당)가 등장한 이벤트(?) 덕분에 개인적으로 <체실 비치에서>는 더 기억에 남을 영화다. VIP시사회인 줄은 모르고 참석했다가 뜻밖의 행운을 누릴 수 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깊은 여운 속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기억에 남으리라 생각한다. <체실 비치에서>는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인 동시에 각본과 연출 곳곳에 연주를 녹여낸 음악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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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나는 영화의 스토리를 더는 언급할 수가 없다.

공식 소개 정도만 알고 봤음에도 작품에 흠뻑 빠졌던 나로서는 스토리 노출이 행여 감상을 방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들의 리뷰에서도 이러한 배려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하필 이번에 유난을 떠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체실 비치에서>는 전형적인 '미괄식' 영화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반전이라든지 놀라운 결말이 있어서가 아니다. 작품의 주된 시점인 현재(6~70년대)의 하루가 두 남녀의 과거를 담아냄과 동시에 쏟아내고, 결국에는 이게 끝이 아닌 영화의 결말로 이어지는 서사를 어설픈 문장들로는 묘사해낼 자신이 없다.


둘째,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헤어지고 만다.'라고 밝혀져 있는 영화의 공식 안내 때문이다. 이미 헤어진 남녀의 이야기를 전제하고 감상에 돌입할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들의 만남과 사랑을 포장해서 얘기한들 공허하지 않겠는가. 결국 최선은 <체실 비치에서>를 보고 난 후의 개인적인 소회를 이어가는 일 뿐이다.




감정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모두에 서툴렀던 에드워드와 플로렌스.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던 건 우습게도 영화를 보기 며칠 전 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퉜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어리석게도 커다란 갈등을 만들어 냈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는 잠시 에드워드일 수 있었다.(내 잘못이었으므로 영화를 함께 보던 중에 여자 친구는 몇 차례나 나를 흘겨보았고 나는 영화와 함께 눈치도 보았다)


커플들이 다들 그렇지 아니한가. 살면서 뭐 그리 대단하고 심각한 갈등으로 다투고 헤어지고 또 만남을 반복하랴.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혹은 그놈의 고집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서로가 다시 보지 않을 타인 아닌 타인으로 남고야 마는 흔한 현실. <체실 비치에서>는 이를 현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잘 표현해 낸 예술 영화였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영화관에서 직접 확인하고 나면 느낄 수 있을 음악적 감성.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이 영화가 에드워드나 플로렌스 둘 중 어느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거나 기울어진 스토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쨌든 나는 남자이기에 그 남자(에드워드)의 사정(사연)에 더욱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을 뿐. 오히려 수많은 플로렌스들에게 <체실 비치에서>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순수하기에 서툴고, 혈기왕성하기에 욱하는 못난 자신을 아직도 이해받고 싶어하는 나의 여전함 때문일까.


나란히 걷던 남녀가 서서히 멀어져 간다.

소실점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싶을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아득히 작아지던 화면과, 이 때 귓가에 은은하게 울리던 클래식 음악이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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