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도가 높은만큼 아쉬웠던 영화, <우상> 리뷰
※ 스포 없습니다.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했습니다.
오랜만에 접한 강렬한 한국형 스릴러 영화였다. 긴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배우 한석규와 설경구의 무게감을 오히려 뛰어넘는 천우희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감독이 말하려는 바를 정확히 짚어낼 자신은 없어도 헷갈리진 않았다. <우상>은 그런 장점들 덕분에 긴 시간 동안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 빠져든 뒤에도 비교적 홀가분하게 스크린에서 헤어 나올 수 있던 영화였다.
진지하고 무거운 메시지는 결국 감독 또한 어떤 '우상'을 좇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무리 의미 있고 훌륭한 이야기라 해도 그걸 너무 심각하게 전달하는 이로부터는 부담감을 느끼기 마련이듯, 영화 <우상>은 종종 그런 무게감이 버거웠다. 관객을 깊숙이 끌어들이려는 영화의 깊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몇몇 조연들의 연기와 발성은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게다가 벌써부터 상당수의 영화평들이 지적하고 있는 전체적인 대사 전달력의 부족은 나 역시 적극 공감한 이 영화의 큰 단점이다. 정말 여러 번 답답했다.
영화는 한 인물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지체 장애를 지닌 아들의 성욕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중년의 남성. 쉰소리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중식(설경구 역)이라는 이름의 사내다. 이어진 화면에서 다급하게 병원을 찾는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샛노란 머리에 허름한 옷차림이다. 누가 봐도 단번에 고단한 삶을 느낄 수 있는 행색이다. 이윽고 그는 경찰의 안내로 싸늘한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다. 눈 앞의 상황을 거칠게 부정해 보지만 자신의 아들인 게 분명해 보인다. 그는 더욱 거칠게 오열하며 무너져 내린다.
화면이 전환되어 또 다른 남자가 등장한다. 출장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는 그는 '의원님'으로 불리는 구명회(한석규 역)라는 인물이다. 얼마 후 사람들로부터 더욱 깍듯하게 대접받는 인물이 등장해 그에게 어떤 안건을 던지며 회유하려 들지만 명회는 자신의 소신을 은근히 지킨다. 올곧은 유명인, 혹은 유력 정치인으로 보일 만한 그의 모습은 젠틀하고 지적이다. 앞서 등장한 중식과는 상반된 모습으로 인해 중식은 더욱 거칠게, 명회는 더욱 부드러운 이미지로 등장하며 영화는 서서히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우상>은 이 두 남자를 둘러싼 이야기가 교차하며 펼쳐진다. 전개의 속도는 무척 빠르며 인물들의 행적이나 내면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공항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들놈이 뺑소니로 사람을 죽인 상황을 접하는 명회의 서스펜스와, 바로 그 사고의 피해자인 아들 부남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파헤치려는 중식의 스릴러가 숨 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형 스릴러의 원조 격으로 여겨지는 <텔미썸딩>의 한석규와, 비교적 근래 개봉했던 <살인자의 기억법>의 설경구가 이따금 머릿속에 떠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화의 소재나 스토리는 다르더라도 일종의 클리셰라고 여길 만한 음산한 긴장감과 추리 과정에서 주연 배우들의 전작이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보기에 영화 <우상>의 짜임새가 두 명배우의 우수한 연기를 완벽히 흡수하지 못하고 단지 그들의 연기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인상을 풍겨서라고 생각된다. 처음에 언급했듯 조연 배우들의 연기력이라든지 캐릭터의 개성, 입체성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영화의 단점도 두드러진 게 아닐까 싶다.
이렇듯 아쉬웠던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극의 중반부터 주요하게 등장하는 한 여인 덕분이다. 그녀는 중식(설경구)의 추적과 명회(한석규)의 은폐에 주요한 열쇠가 되는 련화(천우희 역)라는 인물로, 오직 생존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독하게 살고 있는 중국 여성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련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는데, 이는 비단 스토리의 영향만이 아니라 천우희라는 배우가 지닌 에너지 덕분인 게 확실해 보였다.
그녀가 왜 그토록 강렬했는지를 더 설명하자면 분량도 분량이지만 아무래도 스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삼가야겠다. 아무튼 난 영화를 보면서 이따금 등장한 잔혹한 장면에 놀라기도 했고, 도무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던 설정과 전개에 의아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편안하거나 재밌게, 혹은 스릴을 즐기며 감상하기에는 어둡고 무거운 영화였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또한 확실했던 건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았을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단 사실이다. 사실 그래서 더 아쉽다. 차라리 련화의 독기 어린 사연에 이야기를 집중하여 나머지 설정들을 단순화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결말과 특정 장면을 통해 감독은 전하려는 바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친절함을 보였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러한 진지함이 끝까지 부담스러웠다. 제목부터 '우상'이라며 상징적인 의미를 던진 데 이어 관객에게 무언가를 주입하려는 느낌을 받았달까.
명예나 권력, 부를 추종하며 허상을 좇거나 우상화에 빠져 사는 이들을 다룬 한국 상업영화들 중에 재미를 증명한 작품이 얼마나 많던가. 당장 떠오르는 <내부자들>의 이강희(백윤식 역)와 장필우(이경영 역)만 보더라도 그렇다. 안상구(이병헌 역)와 우장훈(조승우 역)은 말할 것도 없다. 여러 인물의 사연이 얽히고설킨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굉장히 편하게 즐길 수 있던 데 반해, 이 영화 <우상>은 그러한 면과는 동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상>은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 주연의 장편 독립영화' 정도가 맞지 않겠나, 뭐 그러한 품평으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련화는 확실히 무시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