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했던 미국의 인물과 현실은 결국 미국의 영화를 통해.
권력의 맛은 달콤하다.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그 맛을 본 이는 반드시 더 큰 권력을 갈구하게 된다. 역사가 이를 수없이 증명했다. 권력을 좇거나, 권력에 취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이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진시황? 히틀러? 스탈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독재자만이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초 미합중국의 46대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 그의 정치 인생을 다룬 영화 <바이스>는 개인의 권력욕이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공고한 민주주의 체제를 뽐내는 초일류 국가마저 얼마나 뒤바꿀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위트 있게 까발린(?) 영화다.
영화는 9.11 테러라는 미국 초유의 상황에 처했던 딕 체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에게 단호한 지시를 내리는 그는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통령이다. 당시의 대통령 부시의 모습은 영화 초반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딕 체니가 부시 행정부의 어마 무시한 권력자였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사람에게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든 어쨌든 이 영화의 제목은 <Vice>, 부통령을 뜻하는 'vice-president'에서 따온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윽고 화면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딱 봐도 미국의 어느 주(와이오밍)를 배경으로, 투박한 픽업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등장하고 젊은 시절의 딕 체니가 거기서 내린다. 배우는 크리스찬 베일. 와우, 알고 봤으나 역시 그의 등장이라 더욱 반갑고 기대된다. 그런데 웬걸,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대는 그의 모습은 도무지 미래의 부통령이 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연기력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행태 자체가 불량해 보인다. 음주운전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심지어 대학에서 낙제를 하는 것이다.(물론 예일대다)
그런 그에게 계속 이렇게 살 거냐며 따지는 아내의 꾸중이 매섭게 날아든다. 내가 남자를 잘못 고른 거냐며, 여성으로서 실현할 수 있는 삶의 한계를 남편인 당신이 과연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는 그녀의 질타는 한 가정의 갈등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대상까지 부각시킨다. 영화 <바이스>는 초반부터 끝까지 그런 영화다. 거대 권력자 딕 체니의 삶을 한 개인으로서, 가장으로서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저 자기 것, 자기 가족을 우선했던 딕 체니라는 사내의 모습이 곧 미국 사회의 허상이자 권력의 민낯이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 그의 삶이 영화를 통해 비교적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유다.
가정에서 딕 체니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바깥 권력을 마음껏 누리도록 도운 아내 린 체니. 매력적인 배우 에이미 아담스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미국 최고 권력자의 아내를 연기했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실제 린 체니의 모습까지는 알지 못할 것이기에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싱크로율보다는 상황에 맞는 감정 연기였다고 생각된다. 크리스찬 베일은 실존 인물을 따라하려 분장에서부터 말투까지 무던히도 애썼다는 후일담이 있으나 그녀의 경우는 그 정도까지일 필요는 없던 듯하다. 온화하면서도 적절히 강단 있는 모습으로 잘 '연출된' 린 체니는 남편이 가정에서의 안정을 토대로 더욱 자신감을 얻었겠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 인물이었다.
<바이스>는 네오콘의 주요 인물 도널드 럼스펠드, 조지 W.부시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 영화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등의 모습도 반갑다. 십수 년 전 뉴스로 접했던 실존 인물들을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는지가 눈에 띄었다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해 백악관의 과거를 재현해 낸 영화적 구성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다큐였다면 머리로만 봤을 장면들이 어쨌든 영화의 틀에서 그려짐으로써 그래도 골치 아프지 않게 느껴져서 좋았달까. 이라크전을 비롯, 각종 전 세계적 이슈들을 주도했던 미국 유력 인사들의 행태는 확실히 그들의 의도 이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게 분명해 보이긴 했다.
영화의 중간중간 독특한 방식으로 권력자들의 모습을 비트는 연출은 아주 신선했다.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가까운 과거의 일을 그려내다보면 자칫 다큐처럼 느껴질 수 있던 지점에서 감독은 재치를 뽐냈다.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관통한 어떤 인물의 내레이션은 구조적으로도 참신함을 더했으니, <바이스>는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충분히 신선하고 재밌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약간 지루할 수는 있다. 이 영화는 결코 권력의 성취라든지 인물의 성공기를 다룬 희망의 스토리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아주 악랄하고 지독한 인물을 고도의 상업적인 전략으로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평가해 주길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바이스>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국은 역시 미국이다'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떠올리게 해 준 영화!